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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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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무위 이곳에 탄원

등록 2012-08-22 05:36 수정 2020-05-02 19:26

오늘 나는 릴케의 근심을 이해할 수 있다. 그로 하여금 (1902)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게 한 그 감정이 근심이 맞는다면 말이다. “유명해지기 전에 로댕은 고독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성이 찾아온 뒤에 그는 어쩌면 더 고독해졌는지도 모른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모여드는 온갖 오해들의 총합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릴케는 그 뒤에 바로 낙관적인 말을 덧붙였다. 로댕의 위대한 작품들이 결국 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오늘 나는 릴케의 그 낙관도 이해할 수 있다.

시인 진은영이 예전에도 고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최근 2~3년 동안에 그는 더 유명해졌다. ‘정치’나 ‘실천’ 같은 말이 자주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몇 년 동안 보여준 지성과 용기를 보건대 이는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다. 그가 늘 오해만 받은 것도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으리라. 그러나 그의 시는 더 고독해졌을지 모른다. 나는 사람들이 그의 당당하고 예리한 산문들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그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시들에 대해서도 말했으면 싶었다.

시가 물리적 의미에서 가장 ‘순수’해졌을 때 시에서는 시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때 시는 누구 것도 아니고 그저 언어의 것이다. 그러니까 시가 쓴 시다. 말라르메를 따라서 이것이 시의 가장 지고한 경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진은영이 이 시집에 인용한 프랑스의 비평가 블랑쇼의 생각도 그렇다. “시적인 말은 더 이상 어느 누구의 말이 아니다. 그 말 속에서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어느 누구가 아니다. 오히려 말 홀로 스스로를 말하는 것 같다.”( 2부)

나는 이것이 시의 빛나는 한 경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지고한’ 경지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시를 사랑하는 다른 많은 이유들을 쓸쓸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내가 시인 진은영을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저 ‘무위’(無爲, desœuvrement)의 언어로 쓰이는 시, 혹은 시의 목소리만이 울려나오는 시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끊임없이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용산의 목소리, 4대강의 목소리, 죽은 김남주와 산 김진숙의 목소리, 두리반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의 목소리.

그런데도 그 결과물은 언제나 아름답다. 다른 시에서는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놀라운 직유들을 그는 어린아이가 과자를 흘리듯이 한 편의 시 안에 아무렇게나 흩뿌려놓는다. 그가 제아무리 헌신적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의 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고 존경하기만 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질색하고 시에서 그 가치를 수상쩍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얻은 것들에 조금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시는 세계와 싸울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과 함께 싸워야 한다.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1920)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1920)

클레의 그림 (1920)에서 천사는 폭풍에 떠밀리듯 뒤쪽으로 날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저항하듯 앞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베냐민은 진보라는 신화를 맹신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천사가 아니라, 파국에 파국을 거듭하는 중인 역사를 우울하게 ‘돌아보는’ 천사를 봤다. 그리고 그 천사에게 ‘역사의 천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림 하나를 상상해본다. 그 그림에서 천사는 천상으로 떠밀리듯 날아오르고 있지만 필사적으로 지상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가 가장 순수해져도 좋은 때에 그의 언어는 무위의 언어다. 그것이 천사를 하늘로 밀어올린다. 그러면서도 지상을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천사의 언어는 탄원의 언어가 된다. 그 언어가 그를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그래서 천사는 중간에 있다. 밀어올리는 힘과 끌어내리는 힘 사이에서, 상승이기도 하고 하강이기도 한 날갯짓으로, 무위와 탄원의 언어를 함께 말하면서, 천상과 지상의 중간 어디쯤에 떠 있는 천사. 그 천사의 이름은 ‘시의 천사’일 것이다. 이 시집 (창비)에는 그 천사가 깃들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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