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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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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적인 삶은 따분하다는 것

이상 소설을 ‘빠짐없이 수월하게’ 접할 수 있는 <이상소설전집>
넓은 의미의 연애소설, 지독한 현대성을 읽고 또 읽기 위하여…
등록 2012-12-07 23:40 수정 2020-05-03 04:27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이상(李箱) 소설 단행본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공자를 위해 당대의 표기를 따른 책이거나(소명출판사), 방대한 주석 때문에 너무 두꺼워져서 휴대하기 어렵거나(뿔), 한두 편이 빠져 있어서 전집이 아닌 선집이거나(문학과지성사) 그랬다. 모두 훌륭한 책들이지만, 이상의 소설을 한 편도 빠짐없이 온전히 모으되 일반 독자들도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게 정리돼 있는 단행본이 나왔으면 하던 차에, 반갑게도 (민음사)이 나왔다.

새삼스럽게 무슨 이상이냐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쓰인 그의 소설이 갖고 있는 예외적인 현대성은 놀랍다. 맨 앞에 실려 있다고 해서 ‘지도의 암실’과 ‘휴업과 사정’ 같은 초기작부터 읽기 시작했다가는 현대성을 맛보기는커녕 두 쪽을 채 못 넘기고 책을 내려놓게 될 수 있다. 들인 노력을 보답받기 어려운 이 작품들은 건너뛰어도 좋다. ‘봉별기’를 먼저 읽고 ‘지주회시’와 ‘날개’로, ‘단발’을 먼저 읽고 ‘종생기’와 ‘실화’로 나아가는 길을 권한다.

이 소설들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이것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연애소설이다. 그러나 그 연애 이야기가 감추고 있는 것은 이상과 세상의 공방전이다. 예컨대 창부 금홍과의 연애전말기를 적은 ‘봉별기’에서 발견되는, 남녀관계가 상식과 상궤를 벗어날수록 그 연애는 더욱 순수해지고 진실해진다는 역설적인 메시지는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표준적인 삶은 따분하다는 것. 삶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삶은 비틀리고 왜곡돼야 한다는 것.

물론 이런 반항의 논리는 이상의 독창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삶의 기술의 선구자들을 찾자면, 보들레르가 범례적으로 실천하고 ‘데 제생트’(위스망스의 소설 (1884)의 주인공)에게서 상징적인 형상을 얻은, 19세기 후반 이래로 세기말까지 유럽을 휩쓸었던 이른바 ‘데카당티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흔히 퇴폐주의 정도로 번역되지만 적절하다고 하기 어렵다. 이것은 부르주아의 관습에 침을 뱉고 삶을 예술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도저한 정신적 태세다.

예컨대 데 제생트는 “기만술이 인간의 천재성을 특징짓는 증거”이고 “위조”야말로 진정한 욕망 추구의 방법이라고 말하며 최고급 식당에서 보란 듯이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를 권장한다. 이는 이상이 저 유명한 ‘날개’의 프롤로그에서, “인생의 제행(諸行)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된 자신의 동족들에게,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와 “자신을 위조하는 것”을 권하는 대목과 공명한다. 이것이 바로 ‘인공적 생활’(vie factice)에 대한 찬미다.

그러니 이 심미주의자들이 저 흔해빠진 사랑에 빠지는 일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고 출산과 양육으로 귀결되는 것은 그들에게 끔찍한 노릇이다. 보들레르는 유고 산문 ‘벌거벗은 내 마음’에서 “사랑의 유일하며 지고한 관능이란 악을 행한다는 확신 속에 존재한다”고 단언하며 “사랑, 그것은 매음에의 취향이다”라고 덧붙인다. 매음을 사랑의 이상으로 떠받들며 악행으로서의 사랑을 권한다. 왜 하필 매음인가.

데카당들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에서 아르놀트 하우저는 그들이 창부에게 깊은 연대감을 느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인 것이다.”() 그들은 이런 태도에서 ‘정신의 귀족주의’를 발견했고 바로 그것에서 따분한 삶의 탈출구를 찾았다.

네 단락에 걸쳐 거칠게 요약한 이와 같은 데카당들의 지향을 이상은 공유했다. 그러나 많은 소설들에서 그는 도저한 데카당이 아니라 “경기자 중 한 사람이 반드시 자기 통제 기능을 상실해야만 하는 지독한 게임”(보들레르, 같은 책)인 사랑에서 패배한 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그가 삶과의 게임에서 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추구가 좌절됐다 하더라도 목표가 현대적이라면 그 패배까지도 현대적인 것이 아닐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여전히 이상을 읽고 또 읽는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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