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일 저녁 7시. 바람이 몹시 불었다. 경기 부천 상동의 한 빵집. 빵 내음이 솔솔 나는 그곳에서 전 삼성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가 빵을 팔고 있었다. 청바지에 캐주얼 슈트 차림이었다. 빵 이름을 척척 알고, 손님에게 카드를 받아 직접 그었다.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촉발된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 문제는 지난 5월29일 일단락을 지었다. 대법원이 판결을 내렸다. 의혹이 불거진 지 12년 만에 최종 판결을 했다. 면죄부를 줬다.
김 변호사의 빵집 옆 커피숍에서 2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그는 대법원 판결에, 삼성에, 특검에 대해 분노했다. 그의 분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서거로 몰고 간 검찰과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 그리고 시민사회를 향한 고언으로 이어졌다.
= 이번 대법원 판결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판결이었습니다. 에버랜드 CB 발행의 본질이 배임이라는 기존 판례를 뒤집은 판결이죠. 사실상 판례 변경이에요. 이건희 전 회장 일가에 영속불변의 승계를 합법적으로 인정해주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판결이죠. 삼성SDS 사건은 비상장 차익을 넘겨주는 ‘돈의 문제’지만, 에버랜드 CB는 ‘권력 체계의 문제’예요. 우리 사회에서 있는 놈, 잘난 놈에게는 법도 굴복한다는 것, 주류사회의 견고성과 안정성을 보여준 선고였다고 생각합니다.
[THE 인터뷰] 김용철 변호사 <embed src="http://www.hanitv.com/images/swf/flv_player_01.swf?xmlURL=http://www.hanitv.com/data/xml/info.php?movie_idx=410" width="597" height="403" wmode="transparent" allowscriptaccess="always"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embed> - 무죄가 확정된 날, 공교롭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렸습니다.= 한쪽에선 초상 치르는데 한쪽에선 축제를 벌인 게 됐죠. 정치권력은 4~5년으로 끝나지만, 자본의 힘은 무한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판결이었습니다.
- 대법원은 CB를 헐값에 넘겨도 주주 배정 모양만 갖추면 무죄라고 판결했습니다. CB 인수를 포기한 주주의 손해일 뿐 회사의 손해는 아니라는 법리를 편 것 같습니다.= 주주 배정이라는 게 전혀 실체적 진실이 아니거든요. 이미 허태학·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은 사실상 (주주 배정이 아닌) 제3자 배정을 인정했어요. 이사회를 열지도 않았죠. 이사들의 막도장도 이사들이 판 게 아니었어요. 에버랜드 총무파트에서 막도장을 팠죠. 이사들 이름 마다 판 것도 아니라, ‘이사진인’ 이라는 이름으로 팠죠. 몇몇 이사들의 해외 출장으로 정족수도 모자랐죠. 1996년 가을 하루 삼성 본관 부근에서 CB 실권과 주주 납입, 증여가 동시에 이뤄졌죠. 구조본 재무팀이 기획했고요. 불법이든 말든 서류만 만들어 놓으면 무죄라는 겁니다. 그런데 몇몇 대법관은 기가 막힌 판결을 내놓더군요. 형사 재판을 할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 6 대 5의 박빙 판결이었습니다.= 아마 삼성은 대법관들에게 지연·혈연·학연을 활용한 로비를 했을 겁니다. 대법관들은 고등학교 동기부터 사법연수원 동기, 선후배까지 무수한 전화를 받았을 거예요. 내가 삼성에서 했던 경험으로 봐도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유죄로 본 5명의 대법관은 정말 용기 있는 분들이에요. 보통 대법관이 퇴직하면 상당수는 삼성그룹 회사의 사외이사가 되는 수혜를 받습니다. 그분들은 그런 유혹을 뿌리친 것입니다. 또 삼성에 반대를 한 대법관에게는 반기업적 이미지가 덧씌워지게 되죠. 그러면 로펌에서도 대접받기 힘들어집니다. 이들은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정의로운 판결을 선택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에버랜드 사건은 대법에 오는 데 만 12년이 걸린 판결이었죠. 이번 판결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겼다고 보는지요.= 우리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치겠죠. 대법원 법리의 허구성을 잘 아는 사람이든, 잘 모르는 사람이든 이런 것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기득권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기득권 앞에는 모든 사람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괜히 사회정의니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이런 가치관을 심어주게 될까봐 걱정이에요.
삼성 인사 보니 비자금 관련자들 약진해 - 앞으로 삼성이 변할 것 같습니까. 삼성 스스로는 지난 1년 새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만.= 지난번 인사를 보니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디다. 계열사 비자금과 관련된 사람이 공공연히 다 약진했어요. 사장단은 물론이고 실무자들도요. 삼성에서 승진해야 한다면, 공범이 돼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 인사였죠. 그런데 그런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너무 힘들죠. 정말 더럽게 힘드네요. (웃음)
- 삼성은 어떻게 변화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다른 나라에서 보면 한 가문에서 기업을 승계하는 일이 많아요. 창업정신과 문화, 전통을 이어갈 수 있고 이를 통해 경영 효과를 높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도덕성을 갖춰야 해요. 삼성이 한때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을 벤치마킹하려 했죠. 하지만 삼성하고는 많이 달라요. 발렌베리 가문은 주식을 거의 갖고 있지 않습니다. 공익재단을 통해 기업을 운영하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탈세를 안 하고 범죄를 안 저지르고 끊임없이 이익을 내서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내는 겁니다. 삼성도 이같은 기본을 지키면 된다고 봅니다.
- 삼성특검에 대해 불만이 많았죠.= 특검이 법 이름부터 잘못 썼죠. ‘삼성특검’이 아니었어요. ‘이건희 일가 비리 의혹에 관한 특검’으로 이름 붙여야 했어요.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계량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죠. 20만 삼성 직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국가적으로도 손해예요.
용기있는 검사는 잘못 인정하는 검사= (내가) 이건희 전 회장의 비자금 조성 문제를 제기했지만, 특검은 없다고 하더군요. 특검은 해외 비자금 수사도 못한다고 했고, 정·관계 로비 수사도 흐지부지하더라고요. 삼성에서 돈 받은 뒤 되돌려준 사람이 증거까지 제시했는데, 돈 받은 사람은 없다는 (삼성 쪽) 말만 믿더군요. 기본적으로 수사하기가 싫은 것이었겠죠. 법에선 횡령·배임 같은 경제사범이 폭력사범보다 형량이 더 많아요. 그만큼 경제사범이 더 중대한 범죄라는 것이죠. 입법자의 뜻을 법률가들이 관행으로 포장하며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죠.
- 특검 수사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특검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잘나가는 검사들 출세에 지장을 주면 어떡하나? 잘 발표하게 해달라”고요. 거절했더니, ‘진술 거부’로 썼더군요. 해명을 위한 마지막 조서는 진술 거부였어요. 나 참.
요즘엔 삼성의 관리 대상이 됐던 검사들이 요직에 주르르 올라가더군요. 이명박 정부의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하듯 했더라면, 삼성 비자금 의혹은 끝난 게임이에요. 우리나라는 헌법상 현직 대통령은 수사 못해요. 하지만 전임 대통령은 수사 정도가 아니라 구속시키기도 하고 자살에 이르게 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별짓 다 해도 절대로 못 건드리는 성역이 있어요. 바로 무소불위의 자본권력이죠.
- 노 전 대통령 서거로 검찰 수사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검찰은 범죄를 찾아내야 하는 조직이죠. 그런데 어느 한쪽에 대해선 덮잖아요. 검찰이 기소독점이나 기소편의주의를 함부로 쓰는데, 분명히 그 제도들은 검사들을 위한 게 아니죠. 명백하게 국민을 위한 거죠.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도 여러 정황에서 용서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준 것이죠. 일정한 책임감이 있고 그런 조직으로 봤기 때문에 준 거예요.
대검 중수부가 수사를 하면서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모는 거 비극적이지 않나요. 중수부는 폐지돼야 해요. 지금 검찰에 대해 정확히 얘기하자면 ‘×××’예요. 하지만 검찰에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하겠어요. 굳이 말하자면, 정책 판단 능력이 뛰어나고 시대가 요구하는 훌륭한 사람들이죠. (웃음) 지금 중수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지난 정권에서도 잘나갔던 사람들입니다. 어떤 정권에서도 훌륭한 검사로 남아요. 왜냐면, 내가 권력자라도 중수부에 강직하고 고집 피우는 사람을 세우겠어요? 말 안 해도 해주는 사람, 알아서 해주는 사람을 세우죠. 정말 용기 있는 검사는 오랫동안 사건을 추적했지만 (결과가) 아닐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선 ‘잘못한 것 같다’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죠. 죽도록 수사하더라도 못 밝히면 언제든지 되돌아가는 검사가 바로 유능한 검사예요.
- 앞으로 검찰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선 검사도 수사 중인 피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도의적으로 검사복을 벗어야 합니다. 하물며 전직 대통령을 서거에 이르게 했는데 보통 일이 아니죠. 태어날 때부터 검사인 사람 있던가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계속 버티는지. 사표를 내야 할 분들이 내지를 않더군요. 신영철 대법관도 그렇죠. 그분은 창피해지기 전에 그만둬야 하지 않나요. 법복은 잠시 빌린 거지, 자기 것이 아니거든요. 창피할 가치조차 있는 분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사법부와 검찰은 헌법으로부터 신분을 보장받잖아요. 그건 부당한 압력에 맞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자기들 잘 먹고 잘 살라고 그렇게 해준 게 아니에요.
공분이나 의분이 없는 시민사회도 문제 - 현 정부가 너무 권력기관을 도구화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공무원은 국민이 밥을 제공하는 사람인데 밥 주는 사람 위에 군림하면 되나요. 민주 정부는 정부와 국민이 동일체가 돼야 하지 않나요. 정부의 이익이 국민의 이익이 돼야 한다고 봐요. 물론 선거가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시민적 지지가 유지돼야 그 정부의 정통성이 서는 게 아닌가요. 그래서 권력자는 항상 여론과 지지를 유지하는 것에 신경쓰고 있잖아요. 그런데 기업하는 분이 대통령이 되면서 나라 흐름이 영 이상해요.
내가 있어봐서 아는데, 기업은 완벽한 독재예요. 영업현장은 전쟁터죠. 효율이 최고예요. 건설현장에서 몇 명 죽어도 당연한 거예요. 건설의 목적은 빌딩만 올리면 되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정치에서는 사람의 가치가 경제적 이익과 비교될 수 없어요. 용산이 그래서 문제 아닙니까. 큰 범죄인데도 책임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 이런 현실에서 시민사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사회는 아직 공분이나 의분이 없다고 봅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따져 비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분위기에 휩싸이거나 자신들만의 이익에 매몰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지난번 국회의원 299명 가운데 그나마 오염되지 않은 의원들이 노회찬·심상정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떨어졌죠. 국민들이 표로써 심판해버린 거예요. 뉴타운 같은 경제논리로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것도 마찬가지죠.
삼성에 관해서도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할 일을 다 했다고 봐요. 그런데 사람들은 나한테 더 많은 것을 요구해요. ‘왜 가만히 있느냐’며. 나머지 사람들과 국가, 사회는 어디에 있나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 같은 분들이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이 배운 걸 제대로 써먹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조금 더 있으면 제거되거나 구속될지도 모르겠어요. (웃음) 정권을 비판한다고 미네르바도 잡아가던데, 권력보다 더 공고한 자본에 대해 불경죄를 저질렀으니, 뭐. 본업인 변호사 일 하기도 쉽지 않네요. 지난해 서울 서초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냈는데 사무실 유지비도 못 벌었죠. 삼성과 한바탕할 때는 하루에 전화가 200여 통이 오더군요. 그땐 너무 바빠서 제대로 말을 못해줬죠. 그래서 재판이 끝난 뒤 제대로 말해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한 통도 안 오더라고요.
이제는 기업 돈 덥석덥석 받지는 않겠죠인터뷰 동안 바람이 몹시 불었다. 커피숍 유리창으로 본 사람들은 마치 겨울 칼바람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집에 가는 듯이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삼성 사건과 관련해 그나마 얻은 한 가지를 꼽는다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다.
그의 답은 이랬다. “어쨌든 고급 관리와 정치인들이 기업에서 주는 돈을 덥석 받아먹지는 않을 겁니다. 이른바 잘나가는 주류들이 스스로 자신이 조직적 관리 대상임을 인식하고 조금은 자제를 하는 분위기가 된 거라고 보면 어떨까요.” 김 변호사는 여기에 덧붙였다. “물론 이것도 기대일 수 있지마는.”
커피숍 유리창 앞 나뭇잎이 바람에 떨어질 듯 휘날리고 있었다.
부천=글·정혁준 기자 june@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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