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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수 기업 열전] “구 회장, 우리도 전자 할 거야”

등록 2008-08-15 00:00 수정 2020-05-03 04:25

삼성전자와 LG전자 ‘별들의 전쟁’… 출발은 LG가 빨랐으나 삼성이 반도체 시장 먼저 개척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구 회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사업을 하려고 하네.”

1960년대 말 어느 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구인회 LG그룹 회장과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 전자사업 얘기를 꺼냈다. 구 회장이 벌컥 화를 내며 “(이익이)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돈이 되니 사돈이 하고 있는 사업에 끼어들려고 한다”며 분노한 것이다. 사실 삼성과 LG는 사돈 집안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차녀 숙희씨와 구인회 회장의 삼남 자학씨가 결혼해 사돈을 맺었다. 또 이 회장과 구 회장은 경남 진주의 지수초등학교에서 책상을 나란히 맞대고 공부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로, 두 사람은 끝내 서먹서먹해지며 맞수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갈라선다.

삼성전자와 LG전자(옛 금성사). 두 회사 모두 회사 이름에 별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맞수인 두 기업의 경쟁은 ‘별들의 전쟁’이다. 두 회사는 냉장고·세탁기부터 LCD·PDP·휴대전화·디지털TV까지 서로 맞수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별들의 전쟁을 벌인다. 두 회사가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는 상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금성, 첫 국산 라디오를 내놓다

사실, 전자사업을 먼저 시작한 쪽은 LG였다. LG는 한국전쟁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1958년 금성사를 만들면서 전자사업에 뛰어들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회사 이름도 ‘샛별’이라는 뜻의 금성사로 지었다.

다소 보수적인 LG가 당시로선 벤처기업과 같았던 전자회사를 차린 것을 두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금성사는 창립 1년 만인 59년 11월 첫 국산 라디오(A-501)를 만들어냈다. 라디오에는 금성사의 상징인 왕관 모양 마크와 ‘골드스타’(Goldstar) 로고도 함께 찍혔다. 제니스의 미제 라디오가 판치던 때였다.

LG전자 사사(社史)인 〈LG전자 50년〉을 보면, 첫 국산 라디오를 내놓게 된 배경이 잘 나와 있다. 구인회 회장은 58년 형제들과 장남 자경(현 LG 명예회장)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언제까지 미제 PX물건만 사 쓰고 라디오 하나 몬 맹글어 되겄나. 누구라도 해야 하는 기 안이가? 우리가 한번 해보는 기라. 몬자 하는 사람이 고생도 되겄지만서도 하다보면 나쇼날이다, 도시바다 하는 거 맹키로 안 되겄나.”

금성사의 라디오는 처음에는 잘 안 팔렸다. 당시엔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라디오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이 때문에 구 회장은 돈만 먹는 전자사업을 접으라는 요구에 시달렸다. 하지만 행운이 찾아왔다. 박정희 정부가 대국민정책 홍보를 위해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 결과 61년 89만여 대였던 라디오 보급대수가 62년 말에는 134만 대로 늘어났다.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은 한발 늦었다. 이병철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도 그 원인이 됐다. 박 대통령은 이 회장을 “설탕과 밀가루 같은 소비재 장사나 하는 사람”이라 폄하했고, 이 회장 역시 박 대통령을 “만주사관학교를 나온 천박한 군인”( 이맹희 엮음, 청산 펴냄, 1993)으로 여겨 서로 껄끄러운 사이였다.

삼성은 69년 일본 산요와 합작투자 계약을 맺고 전자사업 인가 신청을 냈다. 하지만 금성사는 과당경쟁이 격화될 것이라며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을 결사적으로 막았다. 결국 모든 제품을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삼성은 전자사업에 진출한다. 초기에 삼성은 금성에 밀렸다. 라디오, 세탁기, TV 등 생활 가전 분야에서 삼성은 만년 2위였다. 이 회장은 “왜 이리 당하기만 하노”라며 격노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코노TV’라는 걸출한 스타를 만들어냈다. 당시 TV는 스위치를 켠 뒤 20초 이상 지나야 화면이 나왔다. 이코노TV는 이를 5초 이내로 단축시켰다. 75년 8월 이코노TV가 나오자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이듬해에는 500%라는 경이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LG, 빅딜정책으로 반도체 뺏겨

삼성전자가 만년 2위를 벗어나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난 것은 반도체에 승부를 걸었기 때문이다. 83년 삼성전자는 당시 미국과 일본만 보유하고 있던 64KD램 개발을 선언했다. 경쟁사들은 무모하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삼성은 64KD램 기술 개발에 성공한 데 이어, 84년에는 256KD램을 개발해 반도체를 수출하기에 이른다. 92년에는 D램 반도체 시장점유율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반면 금성사는 반도체에 아픈 추억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가 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사업에 나서자, 금성사도 79년 대한전선의 대한반도체를 사들여 금성반도체를 출범시켰다. 금성반도체는 금성일렉트론으로 이름을 바꾼 뒤 90년 1메가D램, 91년 4메가D램을 잇따라 내놓으며 삼성전자와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98년 김대중 정부의 빅딜정책으로 반도체사업을 현대그룹에 양보하게 된다. 구본무 LG회장은 청와대에서 LG에 반도체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날 밤 구 회장은 “모든 것을 다 버렸다”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반도체에 이어 두 회사가 맞부딪친 사업은 바로 휴대전화였다. 90년대 초반까지 국내 휴대전화 시장은 모토로라가 장악했다. 94년 삼성은 ‘산악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구조에 맞는’ 휴대전화를 내놓는다. 애니콜이었다. 삼성전자가 또 하나의 브랜드 신화를 만든 것이다. LG전자도 삼성전자의 휴대폰 개발에 자극받아 ‘빌딩이 많은 도시지형에 맞다’며 화통이라는 휴대전화를 내놓았으나 큰 재미를 못 본다. 97년 10월 LG전자는 ‘귀족의 자손’이라는 뜻의 싸이언(CION)을 내놓으면서 소비자들의 눈길을 끈다. 싸이언은 2000년 사이버공간(Cyber)을 연다(On)는 뜻의 ‘CYON’으로 이름을 바꿨다. 삼성전자는 세계적으로 1천만 대 이상 팔린 텐밀리언 셀러 휴대전화를 3종류 갖고 있다. 별칭으로 이건희폰, 벤츠폰, 블루블랙폰으로 불리는 제품들이다. LG전자는 초콜릿폰이 텐밀리언 셀러다.

93년 삼성은 27년 이상 써 오던 세 개의 별이 그려진 로고를 푸른색 바탕에 ‘SAMSUNG’을 새겨넣은 현재 로고로 바꿨다. 95년에는 럭키금성그룹이 LG그룹으로 기업이미지(CI)를 교체해, 30년 넘게 신혼부부들의 혼수 1호로 각인되었던 금성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미지 교체 뒤 LG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엘지~’라는 광고송을 히트시켰고, 삼성은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했다. 두 회사는 최근까지 LCD와 PDP, 디지털TV 분야에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어느 때부터인가 두 회사는 세계 1, 2위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하청 조립공장에 그쳤던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제 세계적인 전자기업으로 거듭나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최강자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투자’라는 외로운 결정 때도 옆에 맞수가 있었기 때문에 과감할 수 있었다.

삼성의 시장 리드, LG의 현지 전략

홍덕표 LG경제연구원 상무는 “삼성전자의 강점은 시장을 먼저 읽고 시장을 리드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창의적인 제품에 강하다. 예를 들어 붉은 와인 잔 모양을 형상화한 보르도TV는 2006년 소니의 대표 상품인 브라이바TV를 누르고 세계점유율 1위에 올랐다. 마라톤을 혼자 완주하기 힘들 듯 삼성전자가 옆에 있기에 LG전자도 안주하지 않고 늘 깨어 있다”고 말했다.

김재윤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LG전자의 강점은 현지 시장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이에 맞는 전략을 잘 만들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점이다. 인도 등 신흥국가에서 LG의 백색가전이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 실적이 개선되고 있는 LG전자는 여러모로 삼성전자에 자극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과 LG의 구원투수들

덕장 이윤우, 전략기획가 남용



‘위기 극복의 구원투수들.’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과 남용 LG전자 부회장을 일컫는 말이다. 두 사람은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령탑에 긴급 투입됐다.
남용 부회장은 지난해 3월 주주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언론은 2006년 7월 IMT-2000 사업허가 취소와 함께 LG텔레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지 1년도 안 돼 화려하게 복귀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시장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2006년 LG전자의 영업이익은 전년에 견줘 26.8% 줄어든 9146억원에 그쳤다. 영업이익 1조원 시대를 마감한 것이다. 순이익도 같은 기간 1조5500억원에서 7030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이윤우 부회장 역시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삼성전자를 총괄하던 윤종용 전 부회장마저 퇴진하면서 삼성전자의 수장을 맡게 됐다. 그룹의 대표사업을 책임져야 하는 그의 앞에 놓은 상황들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부회장은 “앞날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두 사람 모두 말단사원으로 시작해 CEO에 오른 ‘샐러리맨의 신화’를 일궈냈지만 서로 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은 전통적인 엔지니어 출신이고 또 다른 사람은 마케팅 전문가다.
46년생인 이 부회장은 대구 출생으로 경북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68년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입사했다. 77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으로 자리를 옮긴 뒤 30년 동안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96년부터 8년간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면서 ‘포스트 윤종용’ 1순위로 꼽혔다.
48년생인 남 부회장은 경북 울진이 고향으로 경동고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LG전자에 입사했다. 89년 구자경 당시 LG그룹 회장(현 명예회장)의 눈에 띄어 회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98년 LG텔레콤 사장으로 부임한 뒤, 8년 동안 LG텔레콤을 이끌면서 680만 명의 가입자 수를 달성했다.
이 부회장은 엔지니어답게 선이 굵고 뚝심이 강한 ‘덕장’의 이미지라고 삼성 사람들은 말한다. 남 부회장은 사업의 핵심과 본질을 꿰뚫는 ‘전략기획가’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취임 2년째인 올해가 본격적인 승부 시점이다. 남 부회장이 신년사에 밝힌 대로 지난해 실적 회복은 ‘단기 성과이며 시작일 뿐’이다. 이 부회장도 성장성이 높은 반도체 신사업에 속도를 내야 한다. 또 삼성의 새로운 먹을거리 사업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 두 CEO가 어떤 색깔의 리더십으로 전략의 밑그림을 그려나갈지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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