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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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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실용서란 무엇일까

등록 2007-03-03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국 출판사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두 권의 번역서

▣ 김경훈 한국트렌드연구소 소장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인가, 아닌가?’

이 칼럼을 쓰기 위해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한 대학교수가 지은 책 (진효명 지음, 은미영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중국식 자기계발서다. 저자는 우리 인생이 지혜와 인격, 지식과 성격, 습관, 환경, 시간, 말솜씨, 이미지, 기회, 건강, 사랑이라는 12개의 성공자본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자신에게 부족한 자본을 발전시켜 조화롭게 계발할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틀린 주장일 리는 없는데, 어쩐지 공자님 말씀 같다.

1979년이다. 중국의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 주석이 미국을 방문한 뒤 돌아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주창한 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민을 잘살게 해주면 된다는 논리다. 여기에 선부론(先富論)이 더해진다. 누구든 부유해질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부유해지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역사는 한국이 훨씬 오래됐지만, 부에 대한 논리의 개발 면에서는 지도층부터 나서서 훨씬 앞선 형국이다. 한국인들이 부를 향한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 사회적 분위기는 1990년대 말에나 형성됐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자본주의 후발국인지조차 정체성이 불확실한 중국의 실용서까지 수입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출판사에서는 이른바 ‘1+1’ 행사를 하면서 이 책과 함께 미국의 전설적인 컨설턴트인 데일 카네기의 책을 끼워주었다. 이라는 책인데, 여러 출판사에서 발간했던 책으로 이 출판사에서는 2004년 12월에 내놓은 것이다.

하도 유명한 인물의 책이라 책장을 슬슬 넘겨보았다.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본격적으로 읽어본 적은 없었던 터라, 얼마나 대단한가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무릎을 치게 된다. 필치는 역시 공자님 말씀 같은데 굉장히 현실적이고 논점이 분명하다. 20세기 전반에 쓴 책인데도 화술과 대화에서 겪는 보통 사람들의 어려움이 명쾌하게 정리돼 있고, 제시하는 해결책 또한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다. 역시 자본주의의 한참 선진국에서 고전이 된 책다운 내공이다.

두 권의 책을 덮고 한참을 ‘한국적 실용서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제·경영 분야에서만 번역서의 비중이 80%가 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물론 아직은 한국이 외국에서 배울 점이 많은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하면 간단하다. 하지만 몇몇 첨단 분야에서는 이미 한국이 미국보다 앞서고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몇 년 전에 해마다 미국에서 나오는 100대 트렌드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미국의 트렌드 중 몇 가지는 이미 한국에서는 철 지난 것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을 드나들며 그 나라의 첨단 유행을 한국에 수입하는 방식의 실용서들이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그 인기가 시들해진 것을 생각해보라.

철저하게 현실을 반영하는 실용서의 콘텐츠는 삶의 현장에서 익힌 노하우가 출발점이 된다. 이 노하우들이 검증되고 체계를 갖추면서 기술(skill)로 정립되고, 더 나아가면 학문적 구조를 갖춘 과학으로 발전한다. 대개의 실용서는 기술 정도의 수준에서 책의 꼴을 갖추며 때로는 노하우 그대로, 혹은 탄탄한 과학적 논리 구조를 배경으로 기술을 섭렵하는 책들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50년 이상 된 자본주의의 역사와 앞선 성장의 경험까지 가졌으며 해마다 박사학위 실업자만 4천 명씩 양산되는 고학력의 한국에서 좋은 실용서가 못 나올 이유가 없다.

이제는 출판사들이 조금 분발할 때다. 좋은 콘텐츠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가는 기획, 시장의 요구를 반영해 필자들을 선도하는 에디터십, 그리고 더욱 적극적인 국산 콘텐츠에 대한 마케팅이 어우러진다면 한국도 지식 수입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제 우리 출판도 세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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