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기술피로’를 극복하는 새로운 단계
▣ 김경훈 한국트렌드연구소 소장
갈수록 삶이 복잡해지는 것은 진화의 증거인가?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 생물로, 박테리아에서 인간으로 진화한 역사를 살펴보면 ‘복잡함’은 분명 진화의 증거로 보인다. 더 많은 추가 기능이 있는 휴대전화, 이사 뒤 정주 기간이 길어질수록 부엌을 빼곡하게 채우는 각종 주방기구들, 점점 더 잘게 쪼개 써야 하는 일과도 그렇다.
하지만 복잡함이 행복의 증거는 아니다. 진화는 했을지언정 삶은 피로할 수 있다. 복잡함이 인간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피로감을 느낀다.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복잡함에는 저항감을 느낀다. 첨단 디지털 기기들이 늘어나는 21세기에 ‘기술피로도’라는 말이 와 닿는 것은 인간의 진화가 기술의 진화를 좇아가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다음 단계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즉, 새로운 단순함이다.
(존 마에다 지음, 윤송이 옮김, 럭스미디어 펴냄)은 이런 흐름을 포착한 책이다. 저자인 존 마에다는 뛰어난 그래픽 디자이너, 컴퓨터 과학자이면서 MIT 미디어랩의 교수로, 스스로도 고백하기를 세상이 복잡해지는 데 일조를 한 사람이다. 컴퓨터 아트를 연구하다가 오늘날 웹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움직이는 그래픽을 창안했는데, 정보 경관을 해치고 일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든 데 일말의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자신의 블로그에서 단순함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2004년에는 도시바, 레고, 타임 같은 기업들과 힘을 모아 MIT 미디어랩에 ‘단순함 컨소시엄’(SIMPLICITY Consortium)을 결성했다. 이 컨소시엄은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상품의 단순함을 연구하고 필요에 따라 기술을 개발한다.
그런데 단순함을 구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최근에 개봉한 애덤 샌들러 주연의 코믹 영화 (Click)은 왜 단순함이 필요한지, 하지만 그 단순함이 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주인공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피 터지게 일하면서 가정에도 충실하려고 애쓰는, 한마디로 복잡한 삶을 살고 있다. 이른 아침, 아이들이 TV를 보고 싶다기에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들 중 하나를 작동시킨다. 아! 이 리모컨은 거실 천장에 달린 선풍기를 작동시킨다. 그 다음에 집어든 리모컨. 어이쿠! 이건 아이의 장난감 자동차용이다. 세 번째 꺼내든 것은 마당에 있는 차고 문을 작동시킨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리모컨. 그것은 처음에는 TV 보는 삶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리모컨이 쌓이면 삶은 다시 복잡해지는 것이다.
나도 졸저 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오늘날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은 복잡함이고, 우리는 이 복잡함에서 벗어나 나에게 편리한,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단순함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스마트’(Smart), 즉 영리한 욕망의 트렌드라고 이름 지었다.
저자의 연구는 더 깊이 파고들고 있다. 그는 단순함과 복잡함의 경계를 고민한다. 그는 단순함의 법칙을 10가지 키워드로 정리하는데, 그것은 ‘축소’ ‘조직’ ‘시간’ ‘학습’ ‘차이’ ‘문맥’ ‘감정’ ‘신뢰’ ‘실패’ ‘하나’이다. 하지만 이 키워드들은 단순함의 법칙이면서 동시에 복잡함과의 경계를 묻는 질문이 된다.
‘어느 정도까지 단순화할 수 있을까? ↔ 어느 정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할까?’
‘기다리는 시간을 얼마나 짧게 줄일 수 있을까? ↔ 기다리는 시간을 얼마나 참을 만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책에서 단순함이 시장에서 잘 통한 많은 사례들,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단순함의 추구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21세기의 새로운 트렌드다. 하지만 단순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리는 단순함과 복잡함의 경계에서 배회하며 시계추처럼 ‘이번엔 이쪽!’ ‘이번엔 저쪽!’ 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은 이쪽! 바로 단순함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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