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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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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소비자는 진화한다

등록 2006-09-30 00:00 수정 2020-05-03 04:24

고령사회의 입구에서 숙련된 소비자들의 욕망을 파악하는 법

▣ 김경훈 한국트렌드연구소 소장

먼저 문제 하나 나간다. 국내 최고령 패션모델은?

정답은 올해 97살의 김영수 할아버지다. 지난 7월에 열린 실버모델 선발대회에서 4 대 1에 육박하는 경쟁률을 뚫고 선발되어, 9월20일 개최된 ‘2006 고령친화산업 및 효박람회’ 부대행사인 ‘실버모델 패션쇼’를 통해 데뷔했다. 97살 초고령 모델의 등장은 고령화 사회로 줄달음치는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야마사키 신지 지음, 휴먼비즈니스 펴냄)는 우리보다 앞서 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의 시니어 비즈니스를 분석한 책이다. 일본의 경우 이미 2003년에 성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50살을 넘었고, 개인 금융자산의 4분의 3 이상을 50대 이상이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판 베이비부머라 할 ‘단카이(團塊) 세대’(1947~49년 출생자)는 시니어 소비층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집중적인 분석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현대적인 소비문화에 익숙한 ‘숙련된 소비자’라는 점에서,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랐던 이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된다. 게다가 이들은 2007년부터 무더기로 은퇴 시기에 접어드는데, 이는 퇴직금만 총 40조엔에 달할 만큼 엄청난 자산과 시간을 가진 600만 명의 우량 소비자가 탄생한다는 의미이다.

그럼 시니어 마켓을 제대로 파고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시니어 시장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돕고 시니어들의 소비의식에 대한 디테일을 얻기 위해 다음의 7가지 질문을 던진다. 1.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 것인가. 2. 남은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3. 내게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4. 어떻게 나의 자리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5. 어떻게 하면 안심하고 살 것인가. 6. 어떻게 하면 소중한 인연을 만들 수 있을까. 7.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이 목록은 곧 시니어들의 7가지 화두와 다름없다. 다시 말해서 시니어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무엇에 어려움을 느끼는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지점에 서 있어야만 시장의 문이 열린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의 대표적인 시니어 커뮤니티인 ‘노인회’의 경우, 예전에는 입회 대상의 50%가 가입했으나 최근에는 3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미국의 은퇴자 조직인 ‘American Association of Retired Persons’도 2000년에 정식 명칭을 약자인 AARP로 변경했는데, 얼핏 조삼모사 같지만 그만큼 ‘Retire’(은퇴하다)라는 단어가 베이비붐 세대인 50대들에게 거부감을 일으켜서 가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노인’이나 ‘은퇴자’ 같은 단어와 동일시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대충 ‘실버세대’로 뭉뚱그린 연령별 마케팅이 먹히겠는가?

이 책의 미덕은 이처럼 시니어들의 의식과 숨은 욕구를 디테일하게 분석해놓은 데 있거니와, 다음 사례를 보면 그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일본의 시니어들 사이에서 LCD TV나 PDP TV의 수요가 늘고 있는데, 숨겨진 구매 동기를 조사한 결과 ‘자식 집에는 없고, 손자가 기뻐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손자 세대가 좋아하는 최신 가전제품을 들여놓음으로써 그들이 자주 찾아오게 하는 유인책으로 쓰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마케터와 그러지 못한 마케터는 광고의 콘셉트부터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물론 일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판 베이비부머는 1956~75년에 태어난 이들로, 현재 30대 초반에서 50대 초반까지가 이에 속한다. 인구는 1600만 명 이상,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비율이다. 이는 베이비붐 세대가 주도하는 시니어 마켓이 일본보다 10년쯤 늦게 시작될지 몰라도 그 지속 기간은 최소한 20년 이상일 것이라는 의미다. 여기에 이들이 일본의 단카이 세대보다 더 젊고 인터넷에 익숙하며 감각적인 소비를 즐기는 한층 숙련된 소비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시니어 마켓 역시 결코 단순한 ‘실버시장’이 아닐 거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국내에서도 미래 시니어 소비자들에 대한 한층 디테일한 분석과 대비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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