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빈아 반갑다. 우리가 대학교에 갓 들어간 게 1987년이었지. 들어가자마자 6월항쟁이 터지고 데모 대열에 내몰렸던 게 우리의 첫 번째 대통령 선거 때였으니 25년 만의 선거로구나. 그해에는 아직 선거권이 없어서 투표는 못했다만, 그래도 이번이 우리가 맞는 여섯 번째 대통령 선거네. 그런데 먼저 따질 일 하나 있다. 인마, 너 5년 전에 투표 안 했지. 어느 당이건 나온 후보들 도무지 찍을 생각이 안 난다고 그 전날 술로 떡이 되어 들어가더니 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오후에 또 해장술 마시러 나가서 다시 술떡이 되는 바람에 끝내 투표권 날리고 말았지. 이번에도 또 그럴 생각이냐?
‘중진국 함정’, 그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무슨 말 하려는지 안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선거판은 내가 또 네가 가지고 있는 옳고 소중하고 절박한 것들에 대한 생각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판이 되어버렸다는 것. 옛날 군부독재 때, 아니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먹어온 인간들이 켜켜이 쌓여온 구리디구린 여당 세력이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민주화투쟁 한 것 가지고서 죽을 때까지 종신연금이라도 챙겨먹겠다고 선거 때만 되면 아주 홰를 치려는 야당 세력이나, 한 줌도 안 되는 주제에 아직도 자기들이 혁명가나 되는 양 폼 잡으면서 실제로는 아주 작은 밥그릇 싸움에나 골몰하는 진보 세력 모두 지긋지긋하다고. 길거리의 핼쑥한 사람들은 21세기형의 각종 고통- 학자금, 청년 실업… 한마디로 돈, 돈, 돈- 에 시달리며 삭아드는 판인데 이런 자들을 보면 무슨 다른 별에서 나타난 풀무치들을 보는 느낌이라고. 누가 되든 세상은 똑같이 있는 놈이 없는 놈의 뼈까지 씹어먹는 잔인한 정글일 것이며, 뽑힌 자들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그것을 이유로 ‘표가 부족하다’며 더 큰 지지를 호소할 것이라고.
잘났다. 그런데 벌써 10년째 계속되는 그 비분강개도 이젠 좀 지겹지 않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흔 줄에 들어선 너와 내가 그런 소리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이야기하려고 하니, 기빈이 이놈 잘 들어라. 좀 거창하게 말할게. ‘한국 자본주의 모델의 전환’ 문제다. 지금의 한국 자본주의는 1960년대 경제 고도성장기에 만들어진 틀 그대로다. 중간에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다 해서 개보수가 좀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제도나 레짐 차원의 문제이고, 사회 밑바닥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항상 비슷했다. ‘빨리빨리’ 성장을 해야 하니 ‘될 놈을 밀어주고’ ‘말 안 듣고 일 안 하는 놈들은 조지고’ ‘1등만 기억하고’ ‘돈 안 되는 것들은 내다 버리고’ ‘힘들 때일수록 허리띠 조이고’ 등등이다. 그 덕에 경제성장은 정말 엄청 빨리 했지. 그래서 2007년에는 급기야 전세계 국내총생산(GDP) 규모 11위까지 올라갔으니까.
그런데 ‘중진국 함정’이라고 아는지? 우리나라처럼 급속하게 경제성장해서 치고 올라오던 나라들이 선진국 문턱에서 모조리 좌절하고 결국 다시 가라앉는 현상을 말한다네. 아르헨티나 같은 경우가 그랬다고 하지. 지금 한국 자본주의가 바로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많아. 실제 GDP 규모가 절대액으로 볼 때 옛날에는 우리랑 비슷하던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들은 한참 위로 차고 올라간 지 오래인데 우리나라는 10년 전과 거의 차이가 없으니까. 지금은 15위 정도로까지 떨어졌다지. 중진국 함정의 원인은 바로 고도성장 과정이라고 해. 자본 축적과 노동 공급만 있으면 가능한 ‘외연적 성장’을 하는 와중에 사회는 양극화를 위시해 각종 불평등과 갈등에 빠지게 되지. 그리고 고도성장 체제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한 세력들은 일종의 ‘지대추구자’가 되어 경제의 힘을 빨아먹게 되고. 선진국의 위치로 올라가려면 산업구조나 이를 떠받칠 사회적·정치적 구조 등이 모두 그전보다 훨씬 합리적인 단계로 ‘업그레이드’돼야 하는데 고도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된 낙후된, 그리고 갈등으로 가득 찬 낡은 사회구조가 여기에 납덩어리처럼 발목을 잡는 거야.
벤처, 사교육, 펀드, 부동산에 홀려
세계 자본주의도 그러하지만, 지금 한국 자본주의가 평등이나 혁신 등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성장률 같은 낡은 지표로 보아도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야 이 위기가 풀릴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생각하는 바는 두 가지가 있지. 첫째, 하던 대로 하자. 그리고 오히려 더 철저하게 빡세게 하자. 둘째,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 변화된 상황에 맞게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전반을 새롭게 바꾸어나가야 한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이게 세대로 쫙 갈리고 있네. 내가 보기엔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하던 대로 하자’를 외치고 그것이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나타나고 있어. 그리고 30대 이하의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지금까지의 방식은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생각하는 듯해. 우리 40대는? 그야말로 반반인 듯. 절반 정도는 그 윗세대와 함께 ‘하던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절반은 아랫세대와 함께 ‘바꾸어야 산다’고 생각하고 있지. 참으로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한국 자본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것을 이끌어나갈 정치적 선택은 어떠해야 할지의 문제에 대해 한국 사회는 우리 40대에게 캐스팅 보트를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 스스로에게 인신공격성 발언 좀 해보자. 아까 한국 자본주의가 ‘돈 놓고 돈 먹기의 잔인한 정글’이라고 했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그런 소리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세상을 그렇게 만든 주역이 바로 너와 나이기 때문이야. 대학 시절에는 그 알량한 책 몇 권에 간덩이가 부어서 민중혁명이니 사회주의니 잘도 떠들어대던 우리였다. 그러다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 다음에는 자본주의의 첨병이 되어 벤처에 사교육에 펀드에 부동산에 만화처럼 눈이 달러 표시가 되어 살아온 게 또 우리 아니냐. 오늘날 21세기 한국 자본주의를 만든 건 박정희도 전두환도 아니고 바로 우리 40대 아니냐. 뭔지도 모르고 외쳤던 민중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은 아무 미련이 없지만, 적어도 그때 우리가 아무리 어리고 짧은 생각이나마 간절히 소망했던 세상은 이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세상을 만들다니. 우리 삶에 남은 건 가계부채와 복부비만뿐이라니.
기빈아, 나는 요즘 ‘인두겁’이라는 단어가 자꾸 생각이 난다. 너도 나도 인생 꺾어진 지 오래지만, 나는 갈수록 진짜 제대로 사는 게 어떤 건지, 정말 바람직한 세상이 어떤 것인지 점점 더 모르겠다. 그런데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나 자신도 버거운 판인데 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내려야 할 결정은 자꾸 더 늘어가니까 힘들고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그런데 당분간 몇십 년간은 더 많아지겠지. 우리 세대가 내리는 이런저런 결정 때문에 어린 세대는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겠지. 그 고비 고비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기빈아, 우리 ‘인두겁을 썼으면’ 이번엔 술 먹지 말고 꼭 투표라도 하자. 여당 야당 진보정당 욕하고 돌아다닐 나이는 이제 아닌 것 같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부터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가야 할지에 대해 우리는 중요한 결정권을 쥐고 있다. 우리 ‘인두겁을 썼으면’ 젊은 사람들에게 힘을 몰아주자. 너와 나의 복부비만에 대해 참회하는 의미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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