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간 무공천이냐 아니냐로 유권자를 짜증 나게 했던 사태는 ‘없던 일로 하자’는 것으로 귀결됐다.
사실 정당공천을 하느냐 마느냐는 정치 개혁에서 중요하거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기초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을 안 하는 것이 새정치’라는 얘기가 떠도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거대 야당이 이런 논란에 휩싸여 정권을 견제하는 역할도 포기하고 정책선거도 놓아버린 사례는 세계 정치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석유회사 출신 총리, 교토의정서 탈퇴 선언물론 정치제도의 문제점 때문에 정치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삶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많다. 그래서 정치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나라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라에서 정치 개혁의 핵심 의제는 ‘무공천’이 아니라, 득표율에 따라 의석이 배분되는 전면 비례대표제의 도입이다.
대표적인 나라가 캐나다다. 캐나다는 비례대표가 없는 전면 소선거구제를 택하고 있다. 지역구에서 1등을 해야만 국회의원을 낼 수 있다. 이런 소선거구제는 폐해가 아주 크다. 지역구에서 30%를 얻든 40%를 얻든 1등만 하면 당선이 된다. 반면 1등 한 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표는 사표(死票)가 돼버린다.
이런 문제점은 2011년 총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시 캐나다 보수당은 전체 하원 의석 308석 중에 166석을 차지해서 과반수 의석을 획득했다. 그런데 보수당에 투표한 유권자는 전체의 39.62%에 불과했다. 보수당은 40%도 안 되는 득표율로 절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해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득표율을 모두 합치면 60%가 넘는 야당들은 찬밥 신세가 됐다. 당시 신민주당(NDP)은 30.63%를 득표해 104석, 자유당은 18.91%를 득표해 34석, 블록퀘벡당은 6.04%를 득표해 3석, 녹색당은 3.91%를 득표해 1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석을 다 합쳐도 보수당에 대항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선거 결과는 캐나다의 양심적인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보수당에 투표하지 않은 60% 유권자의 의사는 정책 결정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게 됐다. 실제 집권 보수당은 여러 가지 정책에서 무리수를 두었다.
기후변화 대응에 부정적이던 캐나다 보수당은 교토의정서 탈퇴를 선언했다. 2011년 12월12일 발표된 캐나다의 교토의정서 탈퇴 선언은 국제적으로도 큰 충격을 주었고, 교토의정서 체제가 와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때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가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여파는 더욱 컸다. 이후 다른 나라의 탈퇴가 잇따르면서 교토의정서는 종이 조각으로 전락했다.
이런 결정을 주도한 캐나다의 현 총리 스티브 하퍼는 석유회사 출신의 정치인이고, 친미파로 알려져 있다. 그는 환경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에서도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복지는 후퇴하고 교도소를 짓는 예산은 늘어났다는 것이 비판론자들의 지적이다.
사표가 없어지므로 투표율도 높아질 것이런 상황을 보며, 캐나다에서는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초정파적인 운동이 등장했다. ‘공정한 투표 캐나다’(Fair Vote Canada), ‘캐나다 선거연합’(Canadian Electoral Alliance) 같은 조직이 그것이다.
캐나다 선거연합에는 신민주당·자유당·녹색당 당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캐나다 선거연합의 홈페이지(http://electoralalliance.ca/)에 이 3개 정당 대표들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가 발표됐다. 이 편지에서 캐나다 선거연합은 정당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에 우선해서, 정당 대표들이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의 슬로건은 ‘모든 투표가 계산되게 하자’(make every vote count)는 것이다. 독일·뉴질랜드 같은 나라에서 도입된 전면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면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배분되기 때문에 모든 투표가 의미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제도만이 캐나다의 민주주의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투표율도 끌어올릴 것이라는 기대를 낳는다. 전면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사표가 없어지기 때문에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할 동기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더 많은 여성과 소수자가 국회로 진입할 수 있게 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책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믿음이다. 실제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인 유럽 국가들은 비례대표제 중심의 선거제도를 택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2015년 캐나다 총선을 향해 힘을 모으고 있다. 2015년 총선을 계기로 캐나다의 선거제도를 전면 개혁하자는 것이다. 캐나다 야당들이 전면 비례대표제를 매개로 연대하고, 선거 뒤 선거법을 개정해서 전면 비례대표제를 현실화하는 그림을 꿈꾸고 있다.
절반 못 미치는 표 얻고 과반수 차지한 새누리대한민국의 현실도 캐나다와 다르지 않다.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지역구에서 43.3%, 비례대표 정당투표에서 42.8%를 득표했다. 그런데 의석수는 과반에 이르는 152석을 차지했다. 새누리당과 비슷한 성향의 자유선진당과 국민생각까지 포함하더라도 이들 정당이 얻은 정당 득표는 46.7%였다. 절반도 안 되는 득표를 한 것이다. 그런데 새누리당과 자유선진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300석의 국회 의석 중 157석에 달했고, 이 의석수로 국회의 의사결정은 좌지우지됐다. 그 결과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새정치의 핵심은 ‘절반도 안 되는 득표로(그것도 낮은 투표율하에서) 다수의 행세를 하며 독선과 전횡을 일삼을 수 있는’ 소선거구제 중심의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소선거구제 중심에 18% 정도의 비례대표 의석을 갖다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독일·뉴질랜드 등이 하고 있는 것처럼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배분되는 전면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물론 야당 내에서도 기득권 세력은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틀의 정치 변화는 불가능하다.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정치도 불가능하다. 생태위기에 대응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며 소수자의 인권과 평화가 실현되는 정치를 위해서는 전면 비례대표제로 가야 한다. 그것이 진짜 ‘새정치’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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