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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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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일찍 깨달았다면 농부가 되었을 것을

오산학교의 정신을 이어 ‘더불어 사는 평민’ 길러내는 풀무학교
등록 2013-10-10 16:21 수정 2020-05-03 04:27

“어, 농촌총각 결혼지원 조례가 있네요.” 함께 화면을 보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를 찾던 학생이 말한다. 그래서 내용을 한번 클릭해보았다. ‘우아, 500만원! ○○야, 너는 저거 지원받으면 좋겠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나도 조례 내용을 자세히 보게 된다. ‘주소를 둔 지 3년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부분은 그런대로 이해가 된다. 지원 대상으로 지목된 학생은 주소 이전을 한 지 2년이 되었다고 하니 1년만 지나면 지원받을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이 제한이 있다. 만 35살 이상이어야 한단다. 여학생들이 “○○야, 너는 안 되겠다”고 웃으며 말한다. 아직 20대인데 만 35살이 될 때까지 결혼을 미뤄야 하나?
조례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조례가 왜 총각만 지원하나요? 여성에 대한 차별인 것 같다” “ 조례 개정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라는 얘기도 쏟아진다.

자립적이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평민’

올해 6월 하이디논(오리농법으로 짓는 논)에서 열심히 키운 모를 손으로 낸 날의 풍경. 자유학교 친구들이 함께했다. 마지막에는 논에 풍덩풍덩 빠뜨려 모두 논흙 범벅이 되게 놀았다. 풀무학교 홈페이지 갈무

올해 6월 하이디논(오리농법으로 짓는 논)에서 열심히 키운 모를 손으로 낸 날의 풍경. 자유학교 친구들이 함께했다. 마지막에는 논에 풍덩풍덩 빠뜨려 모두 논흙 범벅이 되게 놀았다. 풀무학교 홈페이지 갈무

여기는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 있는 풀무학교 환경농업전공부다. 2년제로 운영되는 대안적인 교육기관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농사와 인문학에 대해 공부하는 학교다.

나는 지난 8월부터 일주일에 한 차례씩 ‘인권과 자치’라는 제목의 강좌를 맡아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교수 생활을 2009년 12월에 정리했으니까, 3년9개월 정도 만에 정기적인 강좌를 다시 맡게 된 셈이다. 정기성이 있는 강좌는 좀 부담스럽지만, 선뜻 강좌를 맡게 된 것은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부의 설립 취지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풀무학교는 고등학교 과정인 고등부에서 출발한 학교다. 일제강점기에 평안도 정주에 존재했던 오산학교와 맥이 닿아 있다. 학생들이 역사책에서 접하는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도산 안창호의 강의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재산을 털어 설립한 학교다. 조만식·유영모·함석헌 같은 지식인들이 교장·교사로 일하며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던 학교였다.

오산학교와 연을 맺고 있다가 해방 이후 남한으로 내려온 이찬갑이 1958년 충남 홍성에 설립한 학교가 풀무학교다. 오산학교의 정신을 이어 ‘더불어 사는 평민’이라는 교육목표를 가지고 설립되었다. 풀무학교 고등부의 초창기 졸업생들은 지역에서 신용협동조합·생활협동조합을 만들고 친환경 농업을 개척해왔다. 그래서 홍성군 홍동면은 우리나라 친환경 농업의 메카로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풀무학교 고등부는 전국에서 많은 학생들이 서로 오고 싶어 하는 학교가 되었다.

나도 처음에는 고등부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와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교사가 학교를 그만두고 풀무학교 전공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 이런 곳도 있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고등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풀무학교 전공부는 덴마크에 여럿 있다는 시민대학(‘민중대학’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과 유사한 교육기관이다. 덴마크는 한때 북유럽의 강자라고 불렸지만 19세기 중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해 많은 영토를 잃었다. 그 뒤 그룬트비라는 사상가의 영향으로 곳곳에 농민을 위한 학교를 세우며 공동체를 재건해나간 경험이 있다. 지금은 세계에서 행복도가 가장 높다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덴마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그룬트비다. 이 그룬트비가 강조했던 것이 우리나라 말로 ‘평민’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다. 땅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자립적이면서도 공동체에 기여하는 주체인 평민. 이 평민을 길러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성이 더 많은 학교, 농사일하러 오는 중2

‘엘리트를 길러내겠다’ ‘상위 1%가 나머지를 먹여살린다’는 얘기가 횡행하는 대한민국에서 ‘더불어 사는 농민’을 길러내겠다는 학교에 누가 올까?

그러나 신문에 광고를 내지 않고 특별한 홍보도 하지 않지만 알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풀무학교 전공부에는 한 해 10명 이내의 학생이 들어와 2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며 ‘더불어 사는 농민’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벼농사·밭농사·원예 등에 대한 실습도 하고 여러 인문강좌도 듣게 된다. 학교가 마을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을’도 접하게 된다.

전공부를 졸업한 뒤에는 홍성에 남는 경우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 귀촌·귀농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도시로 가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활동가 한 명도 풀무학교 전공부 출신이다. 지금은 활동 때문에 서울에서 살지만, 그 역시 귀촌을 계획하고 있다.

전공부에서 강의하며 약간 놀란 것은 학생 중에 여성도 많다는 것이었다. 지금 2년차 같은 경우에는 남성이 2명, 여성이 6명이다. 흔히 농사를 자신의 전망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남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농촌총각 결혼지원 조례’라는 발상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여성들 중에서도 농촌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농사도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이 꽤 많다.

한 다리 걸치고 지켜보니, 풀무학교 전공부에는 외부 사람도 꽤 찾아온다. 발도로프 교육을 지향하는 대안학교에서는 중3 나이의 학생들이 매년 2주 정도 농사일을 함께 하고 간다. 학생들은 “농사일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좋다”는 얘기를 한단다. 그 경험이 좋아서 자발적으로 며칠 동안 농사일을 더 돕고 가는 학생도 보았다. 딸아이 또래의 청소년들이 오전 일을 끝내고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오는데, 모기에 뜯긴 자국이 보인다. 그래도 좋다고 하니, 그래서 제 발로 찾아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사실 나도 7~8년 전 귀촌·귀농을 고민할 때, ‘풀무학교 전공부’라는 교육기관이 있음을 알고 입학하는 것을 살짝 고민한 적이 있다. 늦은 나이에 결심하기가 쉽지 않아서 고민만 하다가 접었지만, 전공부가 설립된 2001년 이후에 나 같은 고민을 하고 실제로 입학까지 한 사람도 많았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부터 신부, 수녀님, 잘나가던 직장인까지. ‘농’의 가치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풀무학교 전공부를 거쳐갔다.

이런 교육기관이 더 늘어날 움직임도 보인다. 지금 송전탑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경남 밀양에서는 올해 들어 감물생태학습관이 문을 열었다. 천주교 부산교구가 설립한 이 학습관에서는 귀농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지금은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단기과정으로 교육을 하지만, 앞으로는 1년 과정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얼마 전 우연히 귀농을 고민한다는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도시에서의 삶보다는 소박하고 정직한 삶을 원했다. 알바·비정규직…. 청년이라고 하면 이런 단어가 떠오르는 현실에서 ‘귀농’을 고민하는 청년을 보면, 뭐라고 말할지 고민이 된다. 사실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청년이 농촌에서 자리잡기란 쉽지 않다. 귀농한 지 3년쯤 된 후배를 며칠 전 만났다. 한창 농사일이 바쁜 때라 힘들어 보였는데, “올해 농사가 어떠냐?”고 물어보니 “쉽지 않다”고 한다.

편견에 사로잡힌 정부 시책

“학생이 창업(풀무학교에서는 졸업이라고 하지 않고 창업이라고 한다)을 해서 살아가려면 어려움이 많다. 아무리 학교에서 배운다고 해도 농사 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당장 농사만으로 먹고살기는 쉽지 않다.” 풀무학교 전공부 장길섭 선생님의 말이다. 그래서 장 선생님은 귀농 초기에는 일정한 현금 수입을 다른 일을 통해 확보하고, 농사일에 차츰 적응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씀하신다.

귀농이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은 청년들도 잘 안다. 그래도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가겠다는 의지야말로 고귀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인식이나 정책은 아직 멀었다. ‘농촌총각 결혼지원 조례’만 해도 그렇다. 실제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아직도 과거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청년들의 얘기를 들을 준비는 안 돼 있다. 그럴수록 청년들과 농촌·농사를 이어주는 교육기관이,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오늘도 강의를 끝내고 가는 길에 벼가 익어가는 가을 들녘을 본다. 그리고 한마디 되뇌어본다. “나도 좀더 일찍 깨달았다면.” 그래서 청년들에게는 너무 오래 생각하고 너무 망설이지는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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