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초까지 정부는 ‘대화와 소통’을 강조했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경남 밀양에서 휴가를 보낸다고 했고, 한국전력 직원들도 휴가를 밀양에서 보냈다. 그러나 윤상직 장관의 행보는 좀 이상했다. 밀양에 가더니, 송전탑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지역 유림들이나 상공회의소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하는 얘기도 “국책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해달라”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윤상직 장관은 밀양의 송전탑 반대 마을을 방문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려다가 주민들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장관은 시종일관 “대안이 없으니 공사를 해야 한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결국 윤상직 장관의 밀양행은 공사 강행을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보상받고 끝내자’는 ‘이상한’ 현수막들
장관이 방문할 즈음부터 밀양 시내에는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다. 실체가 불분명한 찬성 주민 대책위원회 명의로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를 비난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곳곳에 걸렸다. 관변단체 명의로 ‘보상받고 끝내자’는 취지의 현수막도 붙었다. 정작 송전탑이 지나가는 마을 주민들은 “보상은 필요 없고 사회적 공론화를 하자”는데 엉뚱한 주체들이 지역 여론을 호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한전은 집회 신고까지 냈다. 공기업이 집회 신고를 내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8월22일에도 한전과 시공회사 직원 100여 명은 밀양 영남루 앞에서 집회를 열고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송전선로 건설은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대안 없는 반대, 누구를 위한 반대인가”라고 주장했다. 한전은 방송차량도 동원해 거리방송을 하고 홍보물도 뿌리고 있다.
한전은 사실이 아닌 얘기도 퍼뜨리고 있다. 최근 전력난이 뜨거운 감자가 되자, ‘전력대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송전선로 공사가 빨리 재개돼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밀양 송전선은 전력난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전력난은 늘어난 전기 소비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밀양 주민들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밀양시청은 노골적으로 정부와 한전 쪽을 편들기 시작했다. 밀양시장이 일방적으로 보상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고, 공무원들을 ‘송전선로 홍보 출장반’으로 편성해서 주민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투입했다. 한전 쪽에서 교육받은 밀양시청의 5~6급 공무원 130여 명이 이 일에 동원됐다.
사실 이런 광경은 그동안 여러 곳에서 목격했던 일이다. 지역의 관변단체와 실체가 불분명한 찬성단체가 동원돼 여론몰이에 나서고 지방자치단체가 공무원을 동원해 주민들을 압박하는 것은 과거 핵폐기장 문제와 관련해서도 벌어졌던 광경이다. 시간이 지나도 이런 행태에는 변함이 없다.
권력은 곧 본색을 드러냈다. 한전은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김준한 신부, 이계삼 사무국장, 그리고 24명의 주민들을 상대로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공사를 방해하면 하루에 100만원씩 배상하라는 내용이다. 정부와 한전은 말로는 ‘대화와 소통’을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이런 일들을 준비해온 것이다.
밀양 주민은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한다가처분 신청을 당한 주민 명단을 훑어보았다. 송전탑이 아니었다면 이런 험한 일을 겪지 않고 살았을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자신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오겠다는 송전탑에 대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항의를 해왔는데, 돌아오는 건 가처분 신청, 고소 같은 것이다.
8월26일 새벽에는 밀양시 단장면 동화전 마을 김정회씨 집에 경찰 10여 명이 들이닥쳤다. 40대의 귀농한 농민으로 송전탑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김정회씨를 체포하러 온 것이다. 김정회씨는 자녀 4명이 보는 가운데 경찰에 연행돼야 했다.
경찰의 의도는 한마디로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여럿 있음에도 김정회씨를 표적으로 삼았다. 상대적으로 젊은 일꾼이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은 사람을 가둠으로써 공사 강행을 위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의도였다.
소식을 들은 밀양의 할머니·할아버지들은 밀양경찰서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틀 밤을 노숙하며 김정회씨가 풀려나기를 기다렸다. 경찰은 주민들의 기자회견까지 가로막으려 했다.
신부님, 농민들, 그리고 밀양 할머니·할아버지들의 탄원서가 쇄도했다. 법원은 김정회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할머니들은 김정회씨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풀려난 김정회씨가 한 첫마디는 “잘못된 전력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밀양 주민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이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한전은 ‘보상’을 얘기하며 진짜 쟁점을 회피하려 한다.
밀양의 긴장감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정부와 한전은 추석 연휴 직후에 공사를 강행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주민들의 손발을 묶어 놓으려고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고 김정회씨를 무리하게 연행한 것이다.
그러나 밀양 주민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있다. 밀양의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정말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 한다. 바닷가에 대규모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소를 지어 초고압 송전선으로 전기를 소비지까지 끌고 가는 시스템을 이제는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초고압 송전선은 밀양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 곳곳이 송전선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동해안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765kV 송전선 건설도 추진되고 있다. 이 송전선이 들어서면 강원도와 경기도 곳곳을 지나면서 환경과 경관을 훼손하고 전자파를 내뿜게 된다. 언제까지 이런 방식을 고수할 것인가?
그래서 8월4일 전국의 송전탑 지역 주민들이 모여 ‘전국송전탑 반대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주민들은 ‘보상은 필요 없다’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힘없고 약한 시골 주민들을 희생시키는 전력 시스템을 개혁하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사항이다. 바닷가에 대규모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소를 지어 초고압 송전선으로 송전하는 시스템을 바꾸자는 것이다. 소비지 부근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 가스복합발전 등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지역분산형 전원’으로 방향을 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민들은 우선 토론을 하자고 한다. 그러나 정부는 토론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편안하게 전기를 쓸 수 있을까?밀양 송전탑 문제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정부와 한전은 거짓을 말하면서 힘으로 공사를 밀어붙이려 한다. “밀양 송전선이 없으면 신고리 3호기가 완공돼도 가동을 못한다”는 거짓말을 여전히 하고 있다. 신고리 3호기의 전기는 기존 송전선로들을 통해 송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한전의 시뮬레이션 자료로도 확인된다. 게다가 신고리 3호기는 원전 부품 비리로 인해 언제 완공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한전은 거짓을 반복하고 있다.
사실 밀양 이전에도 정부와 한전은 이런 식으로 일을 해왔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대 초반 강원도를 지나는 765kV 송전선을 건설할 때도 고립된 주민들이 젊은 용역들의 폭력에 끌려나오며 싸움이 끝났다. 아마도 정부와 한전의 머릿속에는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밀양 반대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은 “밀양을 외롭게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은 송전탑 반대운동에서 원전 문제로, 그리고 발전과 송전을 아우르는 전력정책 전반의 변화를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해왔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밀양의 할머니들은 비 오는 산 위에서 노숙을 하고, 용역과 경찰의 물리력에 맞서 알몸으로 싸우고, 포클레인에 자신의 몸을 묶으며 절박하게 저항해왔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보면 올가을에 또다시 할머니들이 포클레인과 공권력 앞에 몸으로 서야 할 듯하다. 같은 하늘 아래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데도, 우리는 편안하게 전기를 쓸 수 있을까?
그래서 밀양 어르신들과 같이하려는 사람들이 ‘밀양의 친구들’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있다. 할 수 있는 일들은 있다. 밀양 송전탑의 진실을 알리고, 전기를 많이 쓰는 수도권에서부터 시민들의 행동을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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