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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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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빈라덴, 미 심장부를 겨냥하다

탈레반 지도자를 향한 눈물의 충성맹세
알카에다는 여객기 이용한 테러공격을 모색하고
등록 2014-03-21 16:39 수정 2020-05-03 04:27

1998년 8월7일 동아프리카 미국대사관 동시테러 사건의 책임을 물어 미국이 오사마 빈라덴을 향해 발사한 토마호크 크루즈미사일은 그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빈라덴과 알카에다를 이슬람권 지하드 전선의 대표주자로 공식화하는 계기가 됐다. 또 아프가니스탄에서 빈라덴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로 송환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빈라덴은 동아프리카 미국대사관 동시테러 사건과 이에 이은 미국의 크루즈미사일 공격으로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킨다.

수포로 돌아간 크루즈미사일 공격

미국의 크루즈미사일 공격을 받은 자와르킬리 캠프는 아프간 동부 파키스탄 접경도시 코스트의 남쪽 11km 부근에 위치한 무자헤딘 훈련장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동아프리카 동시테러 다음날 빈라덴과 연관된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고위 지도자와 테러 그룹들이 8월20일 자와르킬리 캠프에서 회동하며, 여기에 빈라덴도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200~300명이 참석하는 대형 회동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빈라덴은 이미 미사일이 떨어지기 몇 시간 전에 그곳을 떠난 것으로 미국 당국은 나중에 파악했다.

미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파괴된 수단의 알시파 공장. 미국은 이곳을 알카에다가 관련된 화학무기 공장으로 지목했으나 잘못된 정보임이 나중에 판명됐다.한겨레 자료

미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파괴된 수단의 알시파 공장. 미국은 이곳을 알카에다가 관련된 화학무기 공장으로 지목했으나 잘못된 정보임이 나중에 판명됐다.한겨레 자료

9·11 테러를 조사한 미국의 초당파위원회인 ‘테러공격국가위원회’(9·11위원회)의 ‘9·11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조지 테닛 CIA 국장의 보고는 미사일들은 대부분 의도한 목표물을 타격했고, 20~30명의 사망자를 냈으나, 몇 시간 차이로 빈라덴은 놓친 것 같다고 결론 냈다. 공격이 있기 몇 시간 전에 빈라덴은 이곳을 떠났다는 것이다. 빈라덴을 놓친 것은 파키스탄 쪽으로 공격 정보가 누출됐기 때문이라고 워싱턴의 관련 관리들은 추측하고 있다. 캠프를 타격하는 미사일은 파키스탄 영내를 통과해야 하는데, 파키스탄 쪽이 이를 인도의 공격을 받는 것으로 오판하지 않도록 미 합참이 파키스탄에 통보하는 과정에서 일부 파키스탄 관리들이 탈레반과 빈라덴에게 경고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 내에서 회람된 보고들에 따르면, 하미드 굴 전 파키스탄정보부(ISI) 부장이 탈레반에 미국의 공격을 사전 경고했다는 것이다. 빈라덴이 아예 그 캠프에 가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동아프리카 동시테러 뒤 미국의 보복을 예상한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이미 주거와 신변을 정리하고 피신 중이었다고 한다. 자와르킬리 캠프 회동 참석도 그 전날에 결정됐는데, 코스트로 가는 도중에 카불로 행선지를 바꿨다는 것이다. 빈라덴 일행은 전날 바르다크주를 통해 코스트를 향해 가다가 갈림길에서 갑자기 멈춘다. 빈라덴이 일행들에게 “동지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지? 코스트? 아니면 카불?” 하고 묻자, 일행들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카불을 선택했다. 빈라덴은 “그럼 신의 도움으로 카불로 갑시다”라고 결정했다.

미묘한 공격 시기까지 겹쳐, 빌 클린턴 행정부가 빈라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당시는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워싱턴 정가가 연초부터 들끓으며 대중의 관심이 온통 집중돼 있었다. 클린턴이 미사일 공격 며칠 전에 대국민 사과 회견을 하는 등 스캔들은 절정에 오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공격은 스캔들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 무성했다. 정권의 스캔들을 덮기 위해 전쟁을 조작한다는 당시 영화 (Wag the Dog,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에 비교되기도 했다. 게다가 알카에다가 관련된 신경가스 화학무기 공장으로 지목돼 동시에 미사일 공격을 받은 수단의 알시파 공장에서는 그런 증거와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정보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폭격 직후 수단 정부는 폭격 현장을 언론에 공개하며 의심스런 시설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미국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9·11위원회는 CIA의 정보 판단을 입증하는 독립된 정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클린턴 행정부가 이 정보 판단을 의도적으로 이용한 정황도 없다고 판단했다.

“신의 은총으로 나는 살아남았다”

‘무제한 접근 작전’(Operation Infinite Reach)이라고 명명된 이 공격의 결과는 심대했다. 공격 뒤 “신의 은총으로 나는 살았다”라는 빈라덴의 육성이 칙칙거리는 잡음과 함께 공개되자, 이슬람권은 격동했다. 초강대국에 맞서 싸웠고, 초강대국의 초정밀 무기에 겨냥됐으나 이를 피한 빈라덴의 명성은 이슬람권에서 증폭됐다. 빈라덴의 테러 행위로 무고한 자국민 무슬림들이 죽은 케냐와 탄자니아에서도 어린이들이 빈라덴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목격됐다. 파키스탄의 서점가에는 급히 출판된 빈라덴의 전기 두 종이 나왔다. 이슬람권에서 미국의 미사일 공격을 비난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공격 다음날 알카에다의 2인자 아이만 알자와히리는 파키스탄 언론인 유수프자이에게 전화했다. “우리는 아프간에서 10년 동안이나 소련의 폭격을 견디며 살아남았다. 우리는 더 많은 희생을 할 준비가 됐다. 이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미국인들은 이제 그 대답을 기다려야만 한다.”

미국의 크루즈미사일 공격 이틀 뒤, 미국 국무부에는 전화 한 통이 왔다. 남아시아국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 과장 마이클 말리노위스키가 받은 전화통에서는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마르는 그 공격이 이슬람 세계에서 반미 감정을 키우고 더 많은 테러 행위만을 자극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최선의 해결책은 클린턴 대통령이 사임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말리노위스키는 빈라덴에게 보호처를 제공하는 아프간 부족법은 인정하나, 빈라덴은 주인집의 창가에서 이웃에게 총을 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아프리카 테러 사건은 탈레반 지도부 사이에 잠재해 있던 빈라덴 문제에 대한 결단을 내릴 시기를 가져왔다. 탈레반 지도부의 온건파들은 자신들이 빈라덴을 초청한 것이 아니어서 그에게 보호처를 줘야 할 의무도 없는데다, 그의 존재는 탈레반에 적을 양산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미국은 아프간의 친구였는데, 왜 빈라덴 때문에 미국이라는 강력한 존재를 불필요하게 적으로 만드느냐는 논지였다. 더구나 빈라덴의 존재는 탈레반의 최대 후원자이자, 그들이 본받으려는 사우디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했다.

빈라덴을 옹호하던 오마르도 아프간에서 조용히 있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빈라덴에 격노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만약 빈라덴을 넘긴다면 탈레반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걸로 보일 것이다. 이 경우 탈레반은 권력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오마르에게 결단에 대한 압박은 임박한 사우디의 총정보국 수장 투르키 빈 파이살 알사우드 왕자의 칸다하르 방문으로 더욱 증폭된다. 빈라덴이 아프간에서 입을 다물게 하겠다는 약속을 오마르와 한 투르키 왕자가 이제 빈라덴을 사우디로 송환하기 위해 방문을 통보한 것이다. 오마르는 다시 빈라덴을 호출했다. 빈라덴의 회고다.

강화되는 빈라덴 추방 압박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물라 오마르에게 그의 나라를 떠나 신의 광대한 영역으로 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과 부인들을 그의 보호에 맡긴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를 위한 안식처인 땅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라 오마르는 사태가 아직 그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빈라덴은 그때 충성서약을 오마르에게 했다. 빈라덴은 오마르를 신도의 사령관, 즉 선지자 무함마드 사후의 무슬림 지도자인 칼리프로 인정했다. “우리는 당신을 우리의 숭고한 에미르(이슬람 통치자)로 인정합니다. 우리는 모든 무슬림을 데려와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에게 모든 지원과 협력을 할 것입니다”라고 빈라덴은 오마르에게 글을 써서 맹세했다. 빈라덴의 충성서약을 주머니에 넣고 나서, 오마르의 태도는 바뀌었다. 탈레반 지도부 내부에서는 빈라덴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이 여전했으나, 오마르는 다시 빈라덴의 강력한 옹호자로 남았고, 둘의 관계는 이때부터 뗄 수 없는 관계로 굳어졌다. 그 뒤 둘은 칸다하르 서쪽 저수지 둑으로 자주 낚시를 가곤 했다.

그해 9월 중순, 투르키 왕자는 나심 라나 ISI 부장을 대동하고 칸다하르로 향했다. “나와 함께 갑시다. 그래야만 물라 오마르가 우리 둘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것이오.” 투르키는 탈레반의 최대 후원국인 사우디와 파키스탄이 더 이상 빈라덴을 품어주는 탈레반을 인내할 수 없음을 보여야만 빈라덴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칸다하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오마르에게 과거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오마르는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일어나 방을 나가서 약 20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투르키는 오마르가 탈레반 지도부인 슈라와 협의하거나, 혹은 빈라덴과 의논하는지 의아해했다.

마침내 돌아온 그는 어느 때보다 흥분한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통역의 실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나는 우리가 빈라덴을 넘겨준다고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투르키는 떨리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물라 오마르! 나는 당신에게 이 사안을 한 번만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탈레반의 외무장관 격인 물라 와킬 아흐메드 무타와킬을 가리키며, 그가 한 달 전 사우디에 와서 빈라덴의 송환을 협의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오마르는 쇳소리를 냈고 땀을 흘렸다. 한 참석자의 설명에 따르면, 오마르는 너무 격노하고 흥분해서 진정하기 위해 머리에 물을 붓고 왔다. 투르키는 그가 마약을 한 것 같다고 의심했다. 오마르는 투르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왜 당신들은 이 용맹하고 단호한 무슬림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거요? 빈라덴은 아라비아에서 미국인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길 원하는 명예로운 사람이며 뛰어난 사람이다. 그를 박해하는 대신, 당신들은 우리와 그와 손잡고 불신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오마르는 사우디를 ‘점령된 나라’라고 불러, 통역자가 이를 통역하기를 주저하기까지 했다. 투르키는 격노했다. “더 이상 이걸로 볼 일이 없을 거다. 그러나 물라 오마르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신뿐만 아니라 아프간 인민들에게 수많은 해악을 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투르키와 라나는 충격으로 침묵에 빠진 채 공항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탈레반, 사우디와 결별하다

투르키가 2001년 12월10일 방영된 미국 의 등과 한 언론 인터뷰 등에서 밝힌 오마르와의 대화를 토대로 구성한 당시 회동은, 탈레반과 빈라덴이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보여준다. 며칠 뒤 사우디는 카불 주재 자국 대사를 철수시켰다. 탈레반은 이제 사우디와 미국의 자장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미국은 1998년 8월 빈라덴을 겨냥한 크루즈미사일 공격 뒤에도 그를 포착하려는 은밀한 공작을 수차례 시도했다. 기존 크루즈미사일 공격부터 시작해, 아프간 현지 부족세력으로 구성된 빈라덴 추적반의 매복 공격, 파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병력을 동원한 공작, 미군 특수부대 병력의 직접적 투입 등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빈라덴의 행방에 대한 정보의 신뢰성 부족, 현재 제휴 세력의 능력 및 신뢰성 부족, 미군 특수부대 병력 투입을 위한 현지 여건 미비 및 위험도 등이 결국 그 실행을 가로막았다. 특히 이후 빈라덴을 겨냥한 크루즈미사일 공격이 세 차례나 시도됐으나, 정보의 신뢰성과 부수적 피해에 대한 우려 등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빈라덴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공작이 번번이 무산되는 가운데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동아프리카 미국대사관 동시테러로 높아진 위상을 이용해, 미국 등 서방을 상대로 끊임없는 테러 위협을 가하면서 더욱 대담한 테러 공작을 도모한다. 특히 빈라덴 세력은 이때를 기점으로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 전쟁을 본격적으로 모색한다.
미국의 빈라덴 제거 공작이 절정에 오른 1999년 11월 말, 파키스탄과 접경한 아프간의 토라보라 인근 칼단 무자헤딘 캠프에는 서방풍을 물씬 풍기는 4명의 아랍 젊은이가 도착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대학 등을 다닌 아랍 청년인 모하메드 아타, 람지 빈알시브, 마르완 알세히, 지아드 자라의 등장은 그해 봄부터 빈라덴과 알카에다 지도부가 은밀히 모색하던 일에 갑자기 밝은 빛을 비추었다. 여객기를 납치해 미국 본토의 주요 시설물을 공격한다는 전대미문의 테러 공격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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