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희원 저속노화연구소 대표와 씨제이(CJ)제일제당이 협업한 ‘햇반 라이스플랜’ 제품이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진열돼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이렇게 말하면 너무 먹보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흰쌀밥이 좋다. 아무 잡곡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백미밥이 밥으로서는 제일 좋다. 콩밥도, 팥밥도, 발아현미밥도, 오곡밥도, 렌틸콩과 귀리가 대부분인 저속노화밥도, 밥이라기보단 밥의 시뮬레이션이라고 봐야 할 곤약밥마저도 감사하게 잘 먹을 수 있다. 심지어 어떤 날에는 잡곡밥이야말로 씹으면 씹을수록 은은한 단맛이 올라오고 식감도 다채로운 한 끗 위의 밥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타인과 스스로를 속여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백미밥을 제외한 다른 밥은 죄책감을 덜고 양심(또는 진화한 영양학 트렌드나 추구미 등)을 따르느라 먹는 밥임을 인정해야겠다. 왜냐하면 백미가 콩만큼이나 단백질 함량이 높고 당지수가 낮은 슈퍼푸드인 대체 우주가 있다면 그 우주에서 나는 고민 없이 백미밥을 먹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그냥 렌틸콩밥이 맛없는 밥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따뜻한 스튜나 커리 속에서 부드럽게 익은 렌틸콩은 참 맛이 좋다. 그러나 밥과의 궁합은 어떻게 해도 별로다. 낟알이 작아 빨리 익으니 불리지 않아도 되고 영양적으로 훌륭하며 가격도 싸다는 장점이 있지만 밥맛은 영 텁텁하다.
어느 날 저속노화 선생님이 나타났고 렌틸콩을 밥에 넣어 먹는 그의 식사법이 한국을 강타했다. 가속노화 식사의 작동 원리를 요약한 그래프와 ‘백미2:현미2:귀리2:렌틸콩4’의 밥 레시피는 내 냉장고에도 붙어 있게 되었다. 정희원 교수를 따라 한참 렌틸콩밥을 먹다가 간만에 다시 지어 먹어본 백미밥은 충격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달았다. 이토록 1차원적인 만족스러움을 다 버리지 못한 까닭은 미각이 섬세하지 않아서일까? 정제 탄수화물에 익숙해진 몸이 더 섬세하고 복잡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감각을 억누르고 아는 쾌를 불러오라고 아우성치는 걸까? 상당 부분 그렇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미각은 옳고 정확한 말로는 잘 바뀌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젊었던 초등학교 사회 선생님은 앞으로 건강 관련 연구가 얼마나 발전하고 자신의 건강이 얼마나 위험해지든 간에 자기는 백미밥만 먹을 거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선생님이 어릴 땐 나라가 가난해서 애들이 잡곡밥만 먹었고 빼빼 말랐어. 집에서 흰쌀밥을 먹는 아이는 소수였어요. 그땐 다들 더 좋은 밥은 백미밥이라고 했어. 전부 백미밥을 먹고 싶어 했지. 그런데 한국이 살 만해지니까 모두가 백미밥을 먹을 수 있게 됐어. 그러니까 이젠 잡곡밥이 더 좋은 밥이라고 하더라고? 심지어 요즘엔 잡곡밥이 백미밥보다 더 비싸대? 잡곡밥, 그냥도 먹기 싫은데 돈까지 더 내야 해. 선생님은 그냥 맛있고 싼 백미밥에 소갈비 먹고 일찍 죽을래.”
모두 와하하 웃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은 몇 개 없고 싫어하는 음식은 많을 나이의 학생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어른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덜 웃겼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수업 목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일화는 내게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밥에는 기분이 붙는다. 지긋지긋하다, 초라하다, 헛헛하다, 서럽다, 탐난다, 살 것 같다, 살 만하다, 살맛 난다, 이제 서럽지 않다 등의 기분이. 밥에 한번 부착된 감정은 아주 끈끈해서, 밥의 가치와 의미가 달라져도 밥을 향한 감정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다르게 먹고 다르게 먹이려면 가치가 아니라 기분과 감정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쯤 일흔에 가까울 그가 여전히 백미밥만 먹는지 궁금하다. 자의든 타의든 잡곡밥을 먹게 됐다면 잡곡밥을 먹을 때의 표정과 기분이 어떨지도. ‘저속노화’ 돌풍이 그 기세를 이어갔다면 사회 선생님도 끝내 설득됐을까?
정희원은 많은 사람이 의지하는 ‘쌤’이 되었고, 그만큼 비판과 우려도 많이 샀다. 가속노화 개념이 나이주의적으로 또는 외모지상주의적으로 흐를 위험에 대한 우려, 급진적인 가치를 누구보다 빨리 포획해 급진성을 거세한 상품으로 길들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 등 중요한 지적이 이어졌지만, 식탁에 고기가 없으면 벌컥 화내는 사람들의 밥투정에 좀더 가까운 말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저속노화 개념과 렌틸콩밥에 대한 저항에는 밥이 주는 커다란 위안을 빼앗으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어려운가? 삶에 위안을 주는 것이 밥밖에 없을 정도로, 먹는 낙보다 더 고차원적인 낙의 존재를 쉬이 믿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그 낙을 조정해보려는 누구든 맹렬히 미워할 준비가 돼 있을 정도로 어렵다.
정희원은 현재 활동을 모두 접었다. 그의 이론과 저작이 여성 연구원의 지성과 감수성을 착취해서 만든 표절물이라는 폭로가 나왔기 때문이다. 정희원은 모든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오히려 연구원이 자신을 스토킹하며 감정적으로 조종하고 폭언을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맞고소를 이어간 끝에 현재는 양쪽 모두 처벌불원서를 제출하며 사건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표절·불륜 등의 단어가 정희원에게 붙으면서 그는 극도로 절제된 식생활과 극도로 방종한 사생활을 결합하려던 컬트 지도자처럼 취급되고 있다.
정희원의 활약과 함께 힘과 관심을 얻을 수 있었던 의제가 덩달아 주춤할 것이 아깝게 느껴진다. 기후위기, 비거니즘, 과로사, 건강권과 이동권, 자본 통치술로서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모두 건강한 개인과 건강한 사회가 따로 있지 않음을 짚는 주제지만, 이제는 똑같은 얘기도 저속노화 개념이 연상되는 순간 비웃음부터 살 가능성이 크다는 예감이 든다. 정희원이 대중의 신임을 잃었다고 해서 렌틸콩밥이 덜 건강해지거나 우리 호르몬이 다르게 작용하는 건 아닐 텐데도 백미밥이 전보다 훨씬 잘 들어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까 이게 다 렌틸콩밥이 너무 맛없어서 생긴 일이다. ‘저속노화좌’에게 완벽하게 등을 돌린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렌틸콩밥이 조금만, 조금만 더 맛있었더라면 사람들도 좀 덜 화냈을 텐데. 기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고 그중에서도 혀의 기분은 결정적이다. 문제는 그 모든 기분/비위/심기의 변화를 기꺼이 맞춰줄 의향이 있는 존재, 기분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다루며 마음을 장악할 틈을 노리는 존재는 자본이 거의 유일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다음 진보를 꾀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묻게 된다. 정의로운 감언이설이란 가능할까? 내 입에 달고 내 맘을 알아주되 내 몸을 다르게 움직이게 하는 말이란 어떻게 가능할까? 입속의 혀처럼 움직여주는 이 미심쩍은 자본의 바깥에도 반드시 ‘살 것 같다’는 기분을 주는 단맛이 있으리라는 점을 우리는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안담 작가
*냉장고와 도마 앞에서 하는 생각들. 사라지고 나타나는 한 그릇의 음식에 대해 씁니다. 출출할 때 참고하세요.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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