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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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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이들의 사랑과 분노

군산의 실제 역사 배경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이야기 다룬 ‘고래별’
등록 2024-08-23 18:01 수정 2024-08-28 23:01

이번 여름휴가 때 전북 군산에 들렀다. 군산 시내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바다와 금강이 만나는 하굿둑이 지나갈 때도, 일본인 적산가옥 앞의 그늘에서도, 군산의 현대적인 카페와 소품 가게와 독립서점 안에서도 나는 틈틈이 휴대전화를 꺼내 나윤희 작가의 웹툰 ‘고래별’을 봤다. 몇 번이고 봤지만,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군산에 와서 읽자 마음이 새로웠다.

군산 시내는 골목 모퉁이에서는 이제 주인공 ‘수아’가 돌아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항구와 맞닿은 끝자락과 드문드문 남아 있는 철길, 근현대박물관과 채만식 문학관에서 봤던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보면 군산의 실제 역사가 ‘고래별’의 배경이 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래별’은 군산의 친일파 유지의 집에서 아가씨의 말동무로 종살이하던 소녀 수아가 독립운동가 ‘의현’을 구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폭탄과 화약을 나르다 일제 경찰에 쫓겨 물에 빠진 의현을 구해 뭍으로 데려온 수아는 의현을 며칠 동안 동굴에서 돌본다. 그러나 의현이 떠나고 시내 여관에 그가 부탁한 쪽지를 전달하다가 우연히 여관에 묵던 독립운동가들의 경성 은신처에 대한 이야기를 엿듣게 되고, 후환을 제거하려는 독립운동가 ‘해수’에 의해 조달(수산화나트륨)을 마시게 되어 목소리를 잃는다.

목소리를 잃는다는 만화의 전개는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와 오버랩된다. ‘인어공주’를 관통하는 주제가 ‘사랑’이듯 ‘고래별’을 관통하는 주제 또한 ‘사랑’이다. 독립운동하는 의현은 자신의 마음을 ‘연심’이라고 표현한다. ‘모른 척하고 외면해봐야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사람들, 풀 한 포기, 풀 한 줌까지도 사랑하는’ ‘빛 한 줄기라도 이 땅을 비췄을까, 먼 곳에서 올려다보는 달까지 사랑하게 되는’ 열렬한 사랑이다. 비정하고 냉혹한 해수에게도 독립운동은, 그의 나라 조선은 ‘백정이 되라면 되고, 작부가 되라면 되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보다 쉬운’ 사랑의 대상이다.


의현과 해수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길을, 수아는 그들이 사랑한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길을 택한다. 그렇다면 이 웹툰의 또 다른 주제는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 사람이 가진 단 하나의 목숨을 무엇에 쓰느냐에 대한 것이 아닐까? 의현의 아버지처럼 친일해 자신의 입신양명에 삶을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작품 초반부에 수아가 모시는 아가씨 ‘윤화’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자의 몸이기 때문에 유학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던 친일파 아버지가 일본 사람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억압 상황에서 그는 ‘숨소리 한 번 못 내보고 짓밟힐, 마른땅의 들풀처럼은 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스러진다. 딸을 억제하는 친일파 아버지는 일제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딸의 저항은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도 닮았다. 끝없이 저항하고 분노해 결국 자기 목숨을 어떻게 할지 선택하는 그 모습이 독립운동가들의 생사기로가 어땠을지 짐작하게 한다.

‘누군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나라’에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요즘이다. 그 낱낱의 상황과 심정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더라도 당시를 배경으로 한 처절한 작품을 보며 잃어버린 나라를 지키려 한 이들의 깊은 사랑과 분노를 더듬어가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귀한 일이다.

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작은 말풍선과 등장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좇으며 몸과 마음이 아픈 순간을 흘려보냈다. 만화의 세계를 헤엄치며 맛봤던 슬픔과 기쁨, 내 마음을 콩콩 두드렸던 뜻깊은 장면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는 20대 작가가 인생의 절반을 봐온 웹툰의 ‘심쿵’ 장면을 추천합니다. ‘웹툰 소사이어티’는 웹툰으로 세상을 배우고 웹툰으로 이어진 것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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