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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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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할 수 있는 만큼, 우리 모두 영웅

자신과 주변인의 일상 지켜내는 세계 최강 초능력자 이야기 ‘이런 영웅은 싫어’
등록 2024-12-13 22:29 수정 2024-12-19 07:33


2020년 1월, 만 16살이 되던 그해 겨울부터 한겨레21에 연재한 칼럼을 마무리하게 됐다. 같은 칼럼을 쭉 연재한 것은 아니고 다카야스동맥염을 앓는 일상의 이야기를 쓴 ‘노랑클로버’를 매듭지은 뒤에 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웹툰 이야기를 담은 ‘웹툰 소사이어티’를 연재했다. ‘웹툰 소사이어티’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쓰지 못한 수많은 웹툰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견디게 하고, 마침내 자라게 했던 수많은 세계를 나는 기억한다. 무슨 웹툰을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지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역시 답은 하나였다. 내가 좋아했던 최초의 웹툰, ‘이런 영웅은 싫어’다.

‘이런 영웅은 싫어’는 삼촌 작가의 웹툰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초능력을 가진 평범한 고등학생 ‘나가’가 히어로 기관 ‘스푼’에 입사해서 사람들을 구하고, 악당 조직 ‘나이프’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나가는 염동력, 투시, 순간이동을 모두 사용한다.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평범한 고등학생일 수 있겠냐마는, 나가는 악과 맞서 싸우고 히어로로서 일하는 사이사이에도 자신의 학교생활을 하며 친구들, 가족과 함께 일상적이고 사소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초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나가를 보며 어린 시절의 나는 그를 동경했고, 질투했고, 나가가 된 나를 수없이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제 나가의 나이를 앞질러 만 20살이 된 나는 작품이 다루는 주제가 가장 강한 초능력자의 활약이 아니라 그가 지켜내는 자신과 주변인들의 소중한 일상임을 읽는다.

‘노랑클로버’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병을 앓는 순간에도 가질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다. ‘웹툰 소사이어티’도 마찬가지다. 내 일상의 일부인 웹툰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시작했던 칼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작성하기 며칠 전 일상이 위협받는 국가적 위기를 겪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후 며칠간 뉴스를 계속 따라잡느라 휴대전화를 놓지 못했다. 아마 수많은 시민도 그랬을 것이라 믿는다.

‘이런 영웅은 싫어’의 마지막 화에서 나가가 고등학생 시절 구했던 어린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그를 찾아온다. 나가는 피곤함과 퇴사 욕구에 찌든 어엿한 사회인의 모습으로 아이를 맞이한다. 히어로로서의 대단한 사명감을 발견할 수 없는 나가의 모습에 아이는 실망하지만, 아이가 집에 가는 길에 탑승한 버스가 사고 나기 직전 나가가 달려와 초능력으로 막는다. 나가는 자신이 아이를 구했다는 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일이 나가에게 이미 일상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을 관두게 돼도, 똑같은 상황이 오면 너를 구할 거야.” 그리고 그의 독백이 이어진다. “스스로 깨닫지 않아도, 어떤 치열함도 겪지 않고, 큰 시련을 극복하지 않아도, 다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2024년 12월7일 국회 앞에 모인 수많은 시민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반복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 나섰을지도 모른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2024년 연말은 그 어느 연말보다 길지도 모른다. 탄핵안 표결이 끝나고 해산하는 군중이 캐럴에 맞춰 춤추며 떠나가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이미 각자의 세계를 지키는 일상의 영웅들이다. 깊은 감사를.

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웹툰 소사이어티는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신채윤 작가와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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