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란도트’에서 주인공 칼라프 왕자가 묻는다. “왜 일부러 고난의 길을 선택했느냐?”
2015년 6월부터 9월까지 연재된 하가 작가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동명의 넘버가 수록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화려한 배경과 소품 등의 작화는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 눈을 잡아끌었다. 어린 나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그 유명한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마라)인 줄도, 오페라 ‘투란도트’의 넘버인 줄도 모르고 만화를 접했다. 그러나 작품이 정확히 어떤 나라를 배경으로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은 단순히 어렸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이탈리아 작곡가의 손에서 작곡된 이 오페라는 철저히 고증되기는커녕 서양적 시각의 오리엔탈리즘이 반영돼 아시아의 여러 나라 문화가 조각조각 범벅돼 있다. 하가 작가 또한 후기에서 “오페라 ‘투란도트’는 중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탈리아의 작곡가 푸치니의 손에서 탄생되었고 역사적으로 잘 고증된 이야기라기보다는 동양 판타지에 가까운 모습을 많이 보인다”고 꼬집었다.
오페라와는 달리 웹툰 ‘공주는 잠 못 이루고’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은 시녀 류다. 류는 망국 타타르의 시녀로 늙은 왕을 보필해 작중 북경에 간다. 그곳에서 타타르의 시녀 시절 자신에게 다정했던 모국의 왕자 칼라프와 재회한다. 그러고는 공주에게 반해 목숨을 걸고 세 가지 시험에 응시하는 왕자를 위해 공주의 시녀로 잠입해 왕자에게 답에 대한 단서를 흘려준다. 자신과의 결혼을 격렬히 거부하는 공주에게 왕자는 공주가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맞히면 결혼하지 않고 목을 내놓거나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공주는 왕자의 이름을 아는 류를 고문한다. 그러나 타타르 왕국이 멸망하기 전 왕자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그를 사랑하게 된 류는 끝끝내 왕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자결한다.
오페라의 비판점으로 꼽히는 다른 한 가지는 ‘개연성 없는 사랑’이다. 투란도트 공주는 겁탈당한 조상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빼어난 미모에 반한 왕자들을 시험하고 죽인다. 그러나 오페라는 공주가 류의 희생과 왕자의 키스 한 번으로 사랑에 빠져 왕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는 공주의 신념과 그간의 행적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결말이다. 만화에서 왕자와 공주는 결혼하지 않는다. 왕자와 공주 모두에게 소중했던 류의 죽음이 그들 각자에게 커다란 충격과 깨달음을 남겼기 때문이다. 류의 희생은 공주에게는 복수의 허망함을, 왕자에게는 진정한 사랑을 알게 했다.
나는 왜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만화를 명작으로 기억하며 마음에 품고 있는가? 화려하고 반짝이는 작화도 중요하지만, 요모조모 뜯어보면 이 만화에서는 내가 찾아 헤매던 선의를 맨 앞에 놓은 사람이 결국 모두를 구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다정과 선의와 신의처럼 잊히기 쉽고 비물질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화를 끝없이 찾는 이유는 그것들에 의해 구원받았거나 구원받기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임을 믿는다.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류를 고문하며 투란도트가 묻는다. “대체 그까짓 왕자에게 무엇을 빚졌기에. 무엇을 약점으로 잡혔기에 이렇게까지 버티는 것이냐…!”
그러자 류가 대답한다. “한 번의 미소. 그분의 미소 때문입니다.”
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작은 말풍선과 등장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좇으며 몸과 마음이 아픈 순간을 흘려보냈다. 만화의 세계를 헤엄치며 맛봤던 슬픔과 기쁨, 내 마음을 콩콩 두드렸던 뜻깊은 장면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는 20대 작가가 인생의 절반을 봐온 웹툰의 ‘심쿵’ 장면을 추천합니다. ‘웹툰 소사이어티’는 웹툰으로 세상을 배우고 웹툰으로 이어진 것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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