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우울해서 오늘은 일 쉽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웹 개발자로 일하는 한국인 가야는 향수병에 시달리던 중 아예 출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회사가 아닌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정처 없이 걷던 그는 ‘화랑관’(HWA RANG KWAN)이라는 태권도장을 발견하고 홀린 듯 들어간다. 화랑관의 관장 데일 보이어와 사범 지오 로드리게스가 3일간의 체험 교습을 권했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가야는 거절하려 했다. 그 순간, 가야는 화랑관에 사는 고양이 프로이드 박사를 발견한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그는 곧바로 회원 등록을 하고 내친김에 도복까지 사 들고 도장을 나선다.
돌배 작가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네이버에 연재한 웹툰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은 완결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가 아끼는 작품이다. 여전히 가끔 ‘정주행’을 한다. 이 웹툰을 보고 태권도가 배우고 싶어져 부모님께 조른 적도 있다. 비록 태권도를 직접 배우지는 못했으나, 가야의 캐릭터에 몰입해 만화에 등장하는 태권도와 관련된 상세한 설명도 열심히 읽었다.
가야는 화랑관에서 태권도를 배우면서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과 점점 더 가까워졌고,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단단해진다. 운동을 통해서 가야가 성장하는 것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마이클’과의 겨루기였다.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의 남자 마이클은 “싸움을 배우고 싶다”며 화랑관을 찾아온다. 태권도 수련을 가볍게 보고 진지하게 운동하지 않는 그에게 데일 보이어 관장은 가야와 겨루기를 해서 이기면 검은 띠를 주겠다고 말한다. 승급시켜 주겠다는 의미는 아니고, 관장실에 남는 검은 띠를 건네주겠다는 의미다. 마이클은 가야를 얕잡아보지만, 겨루기가 시작되자 중심이 단단하고 안정된 가야를 이길 수 없었다. 자신보다 큰 체구의 마이클에게 승리를 따낸 그를 본 도장 사람들은 가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야를 본받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샌프란시스코 화랑관> 세 번째 에피소드, ‘흰 띠는 흰 띠답게’에서 데일 보이어 관장은 가야에게 흰 띠의 품새인 태극 1장 ‘건’의 의미를 설명한다.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미국인에게 태극에 대한 설명을 듣는 한국인’이라며 웃을 수도 있겠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은 그 의미를 잊었거나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흰색은 백지장처럼 아무런 티끌도 없는 상태, 어느 색깔에도 치우치지 않은 깨끗한 상태를 말해요. 가야씨는 아직 이곳 생활도, 태권도도 처음이라 어렵고 당황스럽겠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중요한 단계예요. (…) 차차 많은 실수와 경험을 거듭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거죠. 초보자였을 때 겪었던 체념과 당혹스러움이 나중에는 아무것도 아닐 때가 분명히 와요. 그때는 아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뿌듯해할 거예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흰 띠는 흰 띠답게, 자연스럽게, 천천히 하면 되는 거예요.”
초등학생 시절 내 삶의 일부였던 만화를 읽으니 다르게 읽힌다. 가야에게 흰 띠는 제로(0)베이스, 아직 적응하지 못한 미국에서의 삶이고 태권도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흰 띠’는 무엇일까. 다른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아도 돌아갈 수 있는 나의 원점, 나의 백지상태. 그런 것은 어디에 있을까? 나의 흰 띠를 찾아 마음속을 마구 헤집어본다. 가야는 지금도 샌프란시스코 어딘가에서 태권도를 하고 있을 것만 같다. 끊임없이 지르고 차고 막으면서, 배우는 마음으로.
신채윤 <노랑클로버> 저자
*“작은 말풍선과 등장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좇으며 몸과 마음이 아픈 순간을 흘려보냈다. 만화의 세계를 헤엄치며 맛봤던 슬픔과 기쁨, 내 마음을 콩콩 두드렸던 뜻깊은 장면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는 20대 작가가 인생의 절반을 봐온 웹툰의 ‘심쿵’ 장면을 추천합니다. ‘웹툰 소사이어티’는 웹툰으로 세상을 배우고 웹툰으로 이어진 것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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