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가 전면 등장하는 드라마엔 사투리 감수를 맡는 이른바 ‘사투리 선생님’들이 있다. 네이티브(원주민) 출신 배우만 출연하는 게 아니어서다. 혹시 당신, 사투리 드라마를 볼 때면 해당 지역 말이 입에서 웅얼웅얼 움트는가? 드라마 촬영지에 여행 간 김에 사투리로 역할놀이를 해보고 싶은가? 네이티브만 사투리 쓰란 법은 없다! <입트영>(EBS 간판 어학 프로그램 <입이 트이는 영어> 줄임말) 부럽지 않은 사투리 트이는 드라마, ‘사트드’들이 있다. <한겨레21>이 엄선한 ‘사트드’를 해당 드라마의 사투리 선생님과 함께 소개한다. 사투리 수업 맛보기는 덤.
2023년 말 쿠팡플레이가 공개한 <소년시대>는 1989년 충남 부여를 무대로 ‘온양 찌질이’ 장병태(임시완)가 부여농업고등학교 ‘싸움짱’으로 오해받으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10부작 드라마다. 영화 <친구>나 <바람>과 닮은 학원물인데, 그동안 영화·드라마에서 잘 등장하지 않은 충청도로 배경을 옮긴 것만으로도 신선하다.
배우 강희만(44)은 드라마 촬영 전 제작진으로부터 대본 사투리 감수, 주연 배우 사투리 지도를 의뢰받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서산에서 태어나 살다 공주에서 대학을 다니고 20대 후반 서울로 이주했다. 2009년 연극 <칼맨>으로 데뷔해 연극, 드라마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동안 코미디 프로그램 외엔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콘텐츠가 거의 없었는데, 충청도 사투리의 매력을 부각하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싶어서 무조건 하고 싶었어요.”
소년들이 우애를 다지는 음주 장면에서 외치는 건배사는 유튜브 쇼츠(짧은 동영상)만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한잔허자!” “이!” “이이~!” 단지 말인데도 드라마의 ‘명품 조연’ 같은 존재감을 발휘한 ‘이(이)’를 등장시킨 사람이 바로 사투리 감수자 강희만. “배우들에게 대사 하다 자신감이 떨어지는 듯하면 어디든 ‘이’를 집어넣어도 된다고 조언”했다. 충청도의 ‘이’는 음의 길이나 높낮이에 따라 전라도의 ‘거시기’처럼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배우가 강희만에게 충남 사투리를 배우면서 ‘공식이 존재하는지’ 물었다. 물론 어미에 모음 ㅠ를 붙이는 식으로 사투리를 만들 수도 있다.(“맛있슈?” “맛있쥬?”) 하지만 그는 ‘충청도 정서’를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했다. “충청도에서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화법을 쓰지 않아요. 대부분 돌려돌려 말하거든요. 최대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정이 있는 것 같아요. 은유적 표현도 많고요.”
농고 4인방과 길을 걷던 병태가, 선화(강혜원)와 다투는 ‘쁘라이어’(공구 플라이어) 종민(정윤재)을 만나서 말로 혼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니가 오늘 헌 짓은 말여, 꽃다운 18세 어린 소녀의 마음에 농약을 친겨.” ‘너는 선화에게 상처 줬어’ 같은 직설적 표현보다 맛깔난다. 이게 뭔 말이여,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웃긴다. 병태와 친구들이 공주시장에서 깻잎 가격을 흥정하는 장면도 화제를 모았다. “(깻잎 한) 자루당 7천원.” “비싸네, 3천원!” “가서 소나 멕이쥬, 뭐.” “아, 5천원!” “아주 그냥, 염소 이불이나 만들어야겄다.” “6천원!” “쌈 싸 처먹어야겄다. 내가 이번에 또 깻잎을 키우믄 공주읍사무소 앞마당에서 목을 맬겨.” 직설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도 ‘그 가격엔 안 판다’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소년시대>가 학교폭력을 다루면서도 ‘코믹’할 수 있는 이유, 웃기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비결도 충청도 사투리의 매력과 드라마의 메시지가 조화를 이룬 덕분이 아닐까. “진정한 고수는 말여. 폭력보담 대화, 분노보담 사랑으로 세상을 대하는 거여.”(5화 병태 대사)
강희만은 <소년시대>에 조연으로도 등장했다. 1화에 병태와 머리를 부딪쳐 쓰러진 ‘아산 백호’ 정경태(이시우)를 진찰하는 보건의 역이다. 2024년 2월에는 서울 종로구 안똔체홉극장에서 상연하는 연극 <잉여인간 이바노프>로도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오월이 찾아오면 ‘다시 볼까’ 떠오르지만 마음이 아려서 ‘복습’하기 어려운 드라마. 2021년 한국방송(KBS)에서 방영한 <오월의 청춘>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배경으로 김명희(고민시)·황희태(이도현)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12부작 드라마다. 2000년대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는 더러 개봉했지만, 미니시리즈 드라마는 희귀하다. <오월의 청춘>은 특히 청춘 멜로라는 외피에 무척 충실한 편이라, ‘명희태’(드라마 주인공인 명희와 희태를 합쳐서 부르는 애칭) 커플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과정에 대한 시청자의 몰입감이 상당하다. 배우 다수가 사투리 연기를 하기에, 드라마를 정주행하다보면 입에서 절로 “워매, 시상에 어짜 쓰까나”가 튀어나올 수 있다.
배우 정욱진(34)은 드라마에서 수련(금새록)을 짝사랑하는 순경 최정행 역을 맡아 눈길을 끌었다. 최정행은 군인들의 폭력으로부터 시민을 지키려 애쓰는 등 시대상을 현실감 있게 전했다. 정욱진이 작품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 부분이 더 있다. 전남 여수 출신인 정욱진은 배우 김보정과 함께 <오월의 청춘> 사투리 감수도 맡았다. “감독, 작가 등 제작진과 함께 대본을 보면서 사투리 부분을 다듬었고요. 제가 남배우 대사, 김보정 배우가 여배우 대사를 전부 녹음한 걸 제작진이 배우들에게 전달했어요.”
정욱진은 사회복무요원 기간을 더하면 스무 해 이상 전남 사투리에 둘러싸여 지냈지만,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며 ‘표준말’을 익히려 부단히 노력했다. 2011년 뮤지컬 <굿모닝 학교 ver.7>로 데뷔해 <쓰릴 미> <랭보> 등의 주연을 맡았고 2018년부터 드라마에도 출연했는데, 사투리 연기는 <오월의 청춘>이 처음이다.
그는 “언어에 재능 있는 배우들은 출신 지역과 무관하게 사투리 연기를 잘한다”면서도, “<오월의 청춘> 참여를 계기로 여수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표준말을 익히려 노력한 시간, 다시 사투리를 살리려 노력한 시간이 겹쳐지면서 “사투리를 더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작품 배경이 40여 년 전이라 자신보다 높은 연배 어른들 말에 귀 기울였고, 어쩌다 헷갈리는 억양이 있으면 고향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도 구했다.
<오월의 청춘>의 주인공 희태는 출세욕 가득한 아버지의 ‘조기교육’ 탓에 표준말을 쓴다. 그런 희태도 놀랄 때는 고향말이 튀어나온다. “왐마!” 드라마 속 ‘멀티링구얼’(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또 있다. 전라도 어머니와 경상도 아버지를 둔 ‘인간 화개장터’ 이광규(김은수)는 두 사투리 모두 익숙하지만 전라도를 차별하는 선임 병장 탓에 경상도 출신인 척 지낸다. 광규는 병장이 괴롭히는 이등병을 도우려 나설 때 처음으로 전라도 사투리를 내지른다. “마 인자라도 말 편히 한께 속이 다 시원해부네, 오메!”
정욱진은 초급자를 위한 전남 사투리 입문으로 추임새 활용을 권했다. “말을 시작하기 전에 ‘아따~’를 써서 에너지를 올려주면 좋아요.” 말을 떼는 추임새로는 “야, 있냐”도 빼놓을 수 없다. 친구에게 말을 걸 때 “야, 있잖아”로 시작하는 것과 같다.
말 중간중간 ‘거시기’도 넣어주란다. 구체적으로 어디에 거시기를 넣을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좀 심하게 쓰자면 ‘거시기’만으로 모든 말을 할 수 있어요. ‘아따, 거시기해서 거시기 좀 하고’처럼 어디든 넣으시면 돼요.”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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