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17일 오전 수원지방법원, 김미나(33)씨가 법정에 들어선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2023년 3월4일치 <경향신문> 지면에 실린 기사의 첫 문장이다. 고양이 학대범을 쫓는 애묘인 김미나씨 이야기를 다뤘다. 3개월 뒤 계간지 <계간 미스터리> 여름호에 같은 이야기가 실렸다. 학대범을 쫓는 김미나씨에 관한 내용은 같지만, 작법이 달랐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죽은 삼색이 고양이가 하얀 세탁망에 몸을 반쯤 걸친 채 쓰러져 있었다.”
기존에 쓴 기사를 ‘내러티브 논픽션’ 방식으로 다시 써서 발표하는 이들이 있다. 실화를 소재로 한 논픽션을 만드는 웹소설·웹툰 기획사 ‘팩트스토리’는 <계간 미스터리>와 함께 이미 보도된 사건과 인물을 더 인간적이며, 넓고 깊게 다른 앵글로 다루는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고나무 팩트스토리 대표가 기존 기사를 발굴해 내러티브 논픽션 방식으로 다서 써서 실어보자고 제안했고, 한국추리작가협회도 이를 받아들였다. 2023년 여름호에 처음 전현진 <경향신문> 기자가 쓴 ‘길고양이 킬러를 추적하다’가 실렸다. <계간 미스터리>는 한국추리작가협회가 발간하는 추리문학 전문 잡지다.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 문학 장르는 팩트스토리가 만드는 핵심 장르 중 하나예요.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나 넷플릭스 시리즈 <애나 만들기> 등도 기자가 쓴 논픽션에 기반했거든요. 한국추리작가협회도 이런 실화에 기반한 범죄 논픽션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희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셨고요.” 고나무 대표가 말했다. 고 대표는 2022년 드라마(SBS)로 만들어진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원작 논픽션 저자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였던 권일용 교수와 함께 써서 <한겨레21>에 연재했고, 책(알마 펴냄)으로도 출판했다.
고 대표는 국내 1호 프로파일러였던 권일용 교수와 함께 쓰고, <한겨레21>에 연재 뒤, 책(알마 펴냄)으로 묶고, 2022년 드라마(SBS)로 만들어진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저자다.
첫 주자로 참여한 전현진 기자는 이전부터 ‘다르게’ 쓰는 방식을 고민해왔다. “저는 글재주가 있거나 단독 기사를 잘 쓰는 기자가 아니거든요. 취재력이 뛰어나지도 않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요.” 매일 마감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 기자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기사를 썼다. 법원을 출입할 때 한 유명 연예인의 음주운전 선고가 있었다. 대다수 언론이 유죄 판결 소식을 전할 때, 그는 그 연예인의 팬에게 주목했다. 선고 이후 법정에서 나오는 연예인에게 사인해달라는 팬의 이야기를 기사에 썼다.
평소 내러티브 논픽션에도 관심이 많았던 전 기자는 회사 뉴콘텐츠팀에 합류해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코끼리’라는 코너를 만들었다. 뉴스레터나 유튜브 등 기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독자를 만나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팀에서,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를 장문의 내러티브 기사로 소개해보겠다는 포부였다. 뉴콘텐츠팀에서 다뤘던 기사 중 하나가 고양이 학대범 추적기다. 200자 원고지 30장 분량의 긴 기사였고, 취재도 많이 해놨지만 이를 다시 <계간 미스터리>에 맞는 장르로 바꾸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면을 만들어 보여주는 일이었다. “논픽션이든 소설이든 영화든 결국에는 장면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몇 가지 장면을 크게 구성해놓고, 그 장면들이 진행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면서 썼던 것 같아요. 해설하지 않고 보여주는 식으로요.”
<em>“궁금한 게 있어서 메시지 남깁니다. 노란색 동그라미 친 것은 똥인가요, 지방인가요?” </em>
<em>김미나는 이 사진을 올린 인스타그램 사용자에게 물었다. 순전히 호기심이 인다는 듯한 태도였다. </em>
<em>“새끼.” </em>
<em>―‘길고양이 킬러를 추적하다’ 중에서</em>
구체적이고 몰입도 높은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전 기자는 추가 취재를 했다. 동물학대범과 김미나씨가 에스엔에스(SNS)에서 나눈 대화를 받기도 하고, 직접 학대범에게 연락하기도 했다. 이전 인터뷰 때 들었던 김씨의 설명을 막상 장면으로 묘사하려다보니 더 찾아보고 확인해야 할 부분도 많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기존 기사에는 없던 장면들이 등장했다.
구성과 흐름도 기사와는 정반대였다. 기사에서 시작은 학대범을 법정에서 만나는 장면이었지만, <계간 미스터리>에 실린 글에선 가장 뒷부분에 배치됐다. 김씨가 처음 학대범의 존재를 알게 되고(발단), 찾으려고 노력했다가(전개), 한계에 봉착했지만(위기), 결국 실마리를 찾아내 포항의 한 폐양어장에서 학대범을 잡고(절정), 재판으로 이어지는(결말) 구조다. 학대범을 잡는 순간의 장면이 영화로 치면 클라이맥스다. 전 기자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취재해 세세하게 장면으로 보여준다.
<계간 미스터리> 2023년 겨울호에 실린 ‘J의 몰락’은 팩트스토리가 기획한 두 번째 내러티브 논픽션이다. 이 글은 <뉴스타파>의 ‘죄수와 검사’ 보도 시리즈가 원작이다. 보도에 참여한 김새봄 피디가 ‘죄수와 검사’ 시리즈 두 번째 기사인 ‘죄수-수사관-검사의 부당거래’ 편에 등장하는 죄수 조아무개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집필했다. 고나무 대표가 기사를 보고 먼저 브로커 역할을 하는 죄수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자고 제안했고, 기사로 풀어내지 못한 부분에 아쉬움이 있었던 김 피디도 이에 응했다.
“사건이 벌어진 걸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인생 얘기를 듣게 되잖아요. 듣다보면 ‘이런 국면에서 이 사건이 벌어지게 됐구나’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사건에 대해서만 담백하게 써야 하는 상황이 많다보니 (기사에 쓰지 못한) 이야기가 쌓이더라고요. 이런 것을 언제쯤 한번은 꼭 논픽션 형태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좀더 재미있게 읽히는 이야기로요.”(김새봄 피디)
‘죄수와 검사’는 <뉴스타파>가 2019년 8월부터 2020년 11월까지 세 시즌에 걸쳐 보도한 탐사보도물이다. 보도 이후엔 400여 쪽에 이르는 동명의 책으로 엮어 출간까지 했다. 탐사보도물의 특성상 상세하게 보도됐고 책까지 나온 상황이었지만, 고 대표는 별도의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빈 부분을 주목했다.
김 피디와 고 대표는 브로커 ‘조씨’라는 사람에게 집중했다. “J라는 사람의 백그라운드를 더 찾아보려 했어요. 처음으로 죄수의 신분이 됐던 사건이 무엇인지 찾았고요. 당시 보도에 담지 못했던 판결 내용도 반영했습니다.” 김 피디가 말했다. 그렇게 ‘J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계간 미스터리>에 조씨를 중심으로 한 내러티브 논픽션이 실렸다. 글은 대학 시절 화려했던 조씨의 이력에서 시작해 다시 조씨의 이야기로 끝난다.
<em>“제2의, 제3의 J가 나와야 합니다.”(2006년 11월5일, 조회수 3290)</em>
<em>2006년 11월5일, 밤 9시11분, 디시인사이드 성균관대 갤러리에 한 편의 글이 게시된다. 평범한 결혼 축하로 시작된 게시글은…”</em>
<em>―‘J의 몰락’ 첫 단락 중에서</em>
<em>“J의 사진이 한 장 있다. 최초의 비운동권 학생회장에다 최초로 재선에 성공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J. (…) 미소를 짓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는 승리했다. 두 번이나.”</em>
<em>―‘J의 몰락’ 끝 단락 중에서</em>
김 피디가 고민했던 건 J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심리나 욕망 같은 것을 어떻게 내러티브 논픽션으로 풀어낼지에 대해서였다. 추측이 가능하다고 그 생각까지 직접 쓰면 소설처럼 보이게 될 것이 걱정됐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J라는 인물이 재판 과정에서 낸 진정서 등이었다. 중간중간 J라는 인물을 J가 직접 작성한 진정서와 진술조서 등을 활용해 설명했다.
고나무 대표는 내러티브 논픽션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과 ‘장면 디테일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새봄 피디의 글을 보면 빌런만 나오거든요. 수사관도 죄수도 검사도 빌런인 악인전 같은 글인데, 기존 스토리에선 이 (조씨라는) 사람이 왜 브로커 역할을 했는지가 흐릿했어요. 그래서 회의하며 이 사람에게 좀더 집중해서 써보자고 했고요. 핵심은 주인공이 빌런이든 좋은 사람이든 인물 중심으로 리라이팅(기사를 다시 쓰는 것)한다는 것이 첫째입니다.”
디테일에 대해선 전 기자가 쓴 글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고양이 학대 사건은 사실 단독 기사도 아니고 여러 언론이 썼던 기사거든요. 저희가 리라이팅 과정에서 초점을 맞춘 장면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학대범을 잡는 순간이었어요. 학대범을 누가 잡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존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잘 나오지 않아요. 민간인이 생업도 바쁜데 길고양이 학대범을 어떻게 잡았을까, 이런 게 디테일이에요. 기존 스트레이트 기사에 잘 드러나지 않는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있어요. 이 부분을 부각했더니 재미있는 논픽션이 됐죠.”
기존 기사를 내러티브 논픽션 방식으로 다시 써서 문학잡지에 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처음부터 기사를 내러티브 논픽션 방식으로 쓰는 시도는 이전부터 많이 있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기자 시절에 쓴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부터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김동진),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등처럼 영화로 만들어져 인기를 끈 작품도 많다. 전현진 기자는 최근 동료 기자 4명과 함께 국내 내러티브 논픽션 장르를 개척해온 이야기꾼 12명을 인터뷰해 <논픽션 글쓰기 전설들>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기사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2022년 12월 출간된 <삼성동 하우스>다. 이 책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성매매 의혹을 보도한 김경래 전 <뉴스타파> 기자가 쓴 ‘소설’이다. 분명 형식은 소설이지만, 읽다보면 2016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기사가 떠오른다. 소설은 취재기자들부터 성매매 영상으로 돈을 벌어보려는 일당까지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말 그대로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송경화 <한겨레> 기자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때 단독 보도한 ‘대통령의 올림머리’ 등 기사에 다 담지 못한 취재기를 바탕으로 소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등을 출간했다. 이런 소설들은 독자로 하여금 결국 그 보도를 다시 찾아보고, 생각하게 한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존 기사의 문법을 넘어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이어진다는 것만큼은 명확하다. 고 대표가 있는 팩트스토리는 <계간 미스터리>와의 협업 외에 전현직 기자들과 영화나 드라마화를 목표로 논픽션 출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어느 정도는 알려졌지만 더 알려져도 좋을 사건과 인물을 한 번 더 알리는 효과가 있고요. 공적인 메시지를 더 매력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목표예요. 공적 메시지를 걷어내더라도 영화 <서울의 봄>처럼 그 자체로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두 번째 목표고요. 취재와 기사가 다양한 콘텐츠로 재탄생하거나 다른 스토리 시장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활용되는 건 앞으로 더 커질 산업이라고 봅니다.”(고나무 대표)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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