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2년이 돼간다. 전황은 희망적이지 않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우크라이나는 결국 반격의 기점을 마련하지 못했으며, 서구는 무관심을 넘어 은근히 휴전을 종용하고 있으니. 도널드 트럼프는 아예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24시간 내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때의 ‘끝’은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에는 그리 좋은 결말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한국을 포함해 ‘서구 세계’에 속한 수많은 사람이 이 전쟁을 지켜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혹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어째서 블라디미르 푸틴은 자기 권력을 완전히 끝장낼 수도 있는 ‘미친 짓’을 벌였는가? 어째서 러시아인들은 미친 독재자를 끌어내리기는커녕 묵묵히 희생을 감내하는가? 임명묵의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는 그간 서구가 알지 못했던, 아니면 외면했던 ‘잘못됨’ 혹은 ‘이상함’의 기원을 추적한다. 지은이는 말한다, 1989년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호기롭게 외친 “역사의 종언”은 이제 종언을 맞이했다고 말이다.
“역사의 종언의 종언”을 알린 건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종언” 10여 년 전인 1979년, 미국도 소련도 아닌 이란에서였다. 팔레비왕조를 끌어내리고 등장한 이슬람 신정(神政)은 그간 비서구가 야심 차게 추진한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일부 도시 엘리트의 배만 불렸을 뿐인 친서구적 근대화를 거부하고 그간 외면받던 전통, 그중 종교에 눈을 놀린 것이다. 이들 ‘신전통주의자’가 보기엔 미국과 소련 모두 ‘서구적 계몽’의 하나라는 점에선 차이가 없었다. 시간차는 있었을지언정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튀르키예와 나렌드라 모디의 인도가 그렇게 아타튀르크와 자와할랄 네루라는 ‘세속적 근대화’의 경로를 벗어나, 경제적 자유를 존중하지만 종교적 정체성은 그보다 더 중시하는 새로운 길로 느리지만 확실히 전환했다.
이러한 ‘신전통주의’의 물결에 가장 적극적으로 올라탄 곳이 다름 아닌 러시아였다. 소련 시절 사회주의란 이름의 ‘서구적 계몽’을 가장 적극적으로 비서구에 수출하기도 했지만, 기실 러시아는 태생부터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끝없이 번민하던 야누스적 제국이었다. 신전통주의 맥락에서 등장한 ‘신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의 이 오랜 고민을 말끔히 해결해줬다. 러시아는 동양도 서양도 아닌, 양자를 아우르는 유라시아의 대륙세력이다. 러시아는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치환하려는 영미의 해양세력에 맞서, 각 지역의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영웅적 투쟁에 나서야 한다!
신유라시아주의를 창안한 알렉산드르 두긴은 흔히 ‘푸틴의 브레인’으로 한국 언론에 소개되곤 하지만, 지은이는 그가 푸틴의 정책 결정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고 단언한다. 두긴의 힘이 미치는 곳은 그보다는 덜 직접적인, 그러나 더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원이다. 영웅적인 대륙세력과 타락한 해양세력 사이의 묵시적 대립, 전통과 도덕, 종교에 대한 강한 믿음, 자유민주주의와 세속화에 대한 불신. 요컨대 두긴은 서구 계몽주의에 맞서는, 심지어 다른 비서구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셈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음울한 전주곡이고 말이다.
차분하게 서구 계몽주의의 위기를 진단하는 이 책은, 역사학자 이병한이 유라시아를 주유하며 남긴 경쾌한 여행기인 <유라시아 견문> 시리즈와 흥미롭게 맞물린다. 궁금한 점은 이병한이 자못 낭만적인 어조로, 임명묵은 더 무거운 어조로 이야기하는 ‘종교 부활’이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다. 충분히 근대화되지도, 그렇다고 지켜야 할 전통과 종교도 없는, 이성과 영성을 모두 결여한 ‘1세계의 말석’이자 ‘선택적 제3세계’인 한국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유찬근 대학원생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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