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지연, ‘조선을 읽는 법, 단’, 푸른역사, 2025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한 몇 달이었다. 2025년 4월4일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파면했지만 공화국엔 치유하기 어려운 상흔이 남았다. 국제 정세도 위태롭다. 4년 만에 백악관에 돌아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보편 가치와 규범을 보란 듯이 저버렸다. 그간 한국이 지켜온 가치인 민주주의가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다.
어쩌면 600여 년 전 조선 위정자가 마주한 현실도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다. 장지연의 ‘조선을 읽는 법, 단’(푸른역사 펴냄, 2025)은 조선의 ‘나라 만들기’가 우리의 막연한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였다고 말한다. 몽골의 원을 몰아내고 천하의 새 주인이 된 명은 조선에 충량한 제후국이 될 것을 요구했다. 문제는 조선은 물론 명에도 이에 대한 마땅한 기준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설계자들은 파악조차 쉽지 않은 명의 요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공동체를 새로이 북돋을 의례를 만들어야 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단’은 조선의 이런 분투가 응축된 곳이다. 단이란 흙을 쌓고 평평하게 다진 제사처로, 인격성이 흐릿한 신격에게 기원함으로써 국가의 위엄을 보이고 이상적인 가치를 투사하는 공간이다. 그런 만큼 ‘성리학 탈레반’의 나라였던 조선에선 단 역시 주희의 말씀을 구현하는 이념적 선전물로 생각하며 마치 옛 사회주의권의 거대한 기념물처럼 단번에, ‘초현실적으로’ 지었으리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아니었다. 풍운뢰우산천성황단, 우사단, 선농단, 사직단과 같은 조선의 여러 단은 여러 전통과 기준을 비교해가며 천천히, 그러나 뚜렷한 이상을 갖고 만들어졌다.
가령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단은 명과 조선 모두에 무척이나 민감한 문제였다. 천자가 버젓이 있는데 감히 제후가 따로 하늘을 기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명의 지방 예서인 ‘홍무예제’에 하늘신인 풍운뢰우지신(風雲雷雨之神)을 모시는 단에 대한 근거가 있다는 데 착안해 사실상의 원단인 풍운뢰우산천성황단을 만들었다. ‘홍무예제’는 하늘뿐 아니라 땅을 기리는 단을 만드는 데도 유용한 준거로 쓰였다.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만들 때 계속해서 단의 크기가 문제가 되자, 성리학의 시조 주희가 아닌 ‘홍무예제’에 따라 너비를 재는 기준인 척을 다르게 적용했다.
조선이 하늘과 땅을 기리는 단 모두에 ‘홍무예제’를 적용했던 건 그저 임기응변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낼 제후국의 의례가 역사적 근거와 이념적 완결성 모두를 갖추길 원했던 고민의 결과였다. 그렇다고 조선의 ‘단 만들기’가 추상적 이념을 현실에 폭력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은 아니었다. 농경의 신을 모시는 선농단에 전례서에 없던 계단이 조성됐다는 사실은 조선이 이념의 실제 구현에 민감한 감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앞서 이야기한 사직단 역시 ‘홍무예제’를 적용했음에도 여전히 단의 크기가 작았는데, 조선은 신위, 악기, 행례자의 배치를 바꿈으로써 공간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무턱대고 과거를 낭만화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조선의 단은 가부장적 질서에 여성을 묶어두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국제질서 가운데서 예치의 이상을 고민하며, 이념이 실제로 구현되는 공간을 세심히 설계한 조선 지식인의 노력은 지금도 되새길 가치가 있다. 민주주의란 말이 가히 범람하다시피 하는 요즘, 그것을 공허한 관념이 아닌 일상의 실천으로 만들어갈 의례와 공간을 고민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찬근 대학원생
*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는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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