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얄팍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리석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문장의 길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요? 짧게 쓰는 게 좋다는 사람도 있고, 짧게만 쓰면 글이 유치해 보이니 길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장 얘기를 하려니 지레 겁나기도 하고 난감한 마음도 드는군요. 조금 돌아가보겠습니다.
여기 두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군악대가 행진하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새떼가 하늘을 나는 장면입니다. 연습이 잘된 군악대는 마치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새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으로 날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데 마치 한 마리가 나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어떻게 수천 마리가 한 마리처럼 날 수 있는지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퍼레이드를 펼치는 군악대원들은 맨 앞에 있는 군악대장의 신호에 맞춰 연주하며 행진합니다. ‘두 번째 후렴구가 시작될 때 관악기 연주자들은 하늘을 향해 악기를 든다’거나 ‘지휘봉을 가로 방향으로 치켜들면 네 박자 뒤에 동시에 연주를 멈춘다’는 식의 약속을 합니다. 까먹지 않고 미리 정한 대로 움직이면 퍼레이드는 ‘성공’입니다. 퍼레이드는 전적으로 리더의 지시에 따릅니다. 약속과 반복 연습, 리더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가운데서 행진하던 대원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퍼레이드는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새떼에는 지휘자가 없습니다. 미리 약속된 것도 없고 호루라기를 부는 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새떼의 움직임을 보면 예측불허, 변화무쌍, 자유자재입니다. 갑자기 방향을 정반대로 틀기도 하고 하늘로 치솟기도 합니다. 방향을 틀면 맨 앞에 있던 새가 갑자기 맨 뒤에 있게 됩니다. 사전 약속도 없고 대장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통사고 하나 나지 않고 자유롭게 납니다.
새들은 어떻게 이렇게 날 수 있을까요? 과학자들에 따르면, 새 한 마리가 방향을 틀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새들이 곧바로 그걸 알아차리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 반응속도가 0.015초밖에 안 걸린다네요. 옆에서 날아가는 동료 새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과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이죠.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공식이나 지침에 따라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글쓰기 선생의 잔소리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얼마나 글쓰기 감각을 키우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를 볼까요. 다음 글을 읽고 ‘고칠 곳’을 찾아보세요.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글쓰기 선생이라면 “문장이 좀 길군. 밑줄 그은 부분에 대해 ‘~ 듯이, ~ 같은’ 따위가 자주 반복되니 지우는 게 어때?”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어쩌죠. 이 글은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대목입니다. 달빛에 비친 메밀꽃밭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역시 글쓰기 선생은 쓸모없습니다).
하나 더 볼까요?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리는 백석의 시 ‘목구’(木具)의 한 대목입니다. 시라 생각 말고 문장으로 읽어보기 바랍니다.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나와 나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 수원백씨(水原白氏) 정주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어떤가요? 놀이하듯 말이 계속 이어지죠. 마지막에는 ‘같은’이란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돼 한눈에 뜻을 알아차리기조차 어렵습니다. 글쓴이는 제사 도구인 나무 그릇이 조상과 후손을 끈질기게 이으면서 그들의 ‘슬픔을 담는 것’이라 합니다. (건방지게 말해서) 꽤 괜찮은 문장이군요.
이 문장은 그저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시간의 감각, 평소보다 훨씬 두터워진 시간을 체험하게 합니다. 목구 안에 이렇게 긴 시간이 담겼다니요. 이 정도 길이의 문장이라야 그 장구한 시간을 담는 데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저도 어느 칼럼에서 판소리처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문장을 (일부러) 쓴 적이 있습니다. 800자 남짓한 길이에 198개의 단어를 썼는데 딱 다섯 문장으로 썼습니다. 한 문장에 무려 71개나 되는 단어를 썼습니다(저는 보통 한 문장에 7~10단어 정도를 씁니다).
걸핏하면 화내는 사람은 주변 인심을 잃을지는 몰라도 자기감정을 시원 방탕하게 배설하니 무병장수할 공산이 큰 반면에, 당하는 사람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을 삭일 길 없어 몸에선 열이 나고 초점 잃은 눈으로 기운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가 이내 허공 위로 긴 한숨을 내뱉고는 답답한 가슴을 팡팡 치기도 하고 맥없이 드러누워 있다가 급작스럽게 벌떡 일어나기를 거듭하며 입이 깔깔하고 볼살이 빠지며 주름은 깊어지는데 예전엔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자리에 눕는 걸로 시위라도 했건만 이젠 그마저도 보기 어려워졌다.(‘왕의 화병’)
왜 그랬을까요? 이 글을 쓸 때 세상 돌아가는 일에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화난다’거나 ‘화를 받아내는 건 힘든 일이다’ 정도의 문장으로는 도저히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담을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어떤 문장을 쓸 건가. 어떤 문장으로 전환해야 어울릴까를 고민했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사건을 잘게 쪼개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긴 문장을 쓰기도 했습니다.
조금밖에 남지 않은 치약을 양 손가락으로 눌러 낡아 뭉개진 칫솔 위에 짜 윗니부터 아랫니로 앞니에서 어금니 쪽으로, 마지막으로 헛구역질을 하며 엷게 낀 혀의 백태를 닦고 수도꼭지에 얼굴을 왼쪽으로 돌려 물을 한 모금 머금은 다음에 올칵올칵 입을 헹구고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며 혀를 날름 내밀어보았다.(‘아버지의 글쓰기’)
그런데 앞의 문장을 다음처럼 쓰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이를 닦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죠. 앞의 문장이 불필요하게 말을 질질 늘이고 있다면, ‘이를 닦았다’는 명료하고 강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청명합니다. 상황에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글쓰기를 생활의 일부라거나 생활과 비슷한 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문자나 채팅을 많이 해서 그럴 겁니다). 생활에서 어떤 지혜를 찾아 쓰는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글쓰기는 생활이 아닙니다. ‘예술’입니다. 다른 예술이 그렇듯이 생활을 배반하고 생활에 저항합니다. 어떻게 저항할까요?
그 답을 시인 김수영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김수영은 ‘시작노트2’라는 글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시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자기 생각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알쏭달쏭합니다. 먼저 형식에 대해서는, “나는 시의 형식 문제에 대해 지극히 등한하다. 형식은 ‘투신’만 하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더군요. 아, 그럼 내용에 집중하나보다 하고 내용에 대한 언급을 보면, “나는 내용에 대해 고심해본 일이 없다. 나의 가슴은 언제나 무(無). 이 무 위에서 파괴와 창조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아, 어쩌란 말입니까. 형식도 내용도 고려하지 않는다니.
그러곤 이어서 이상한 얘기를 합니다. “앞으로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하면 생활을 더 심화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활을 심화시킨다는 말은 먹고사는 일에 더 집중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일이 허공을 휘저으며 거창한 얘기를 하는 일이 아니고, 비루한 자기 삶을 더욱 용기 있게 관찰하겠다는 뜻입니다. 생활에서 오는 고통과 절망과 비관에 더 다가가겠다는 다짐입니다.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은 머리로 하는 것도,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글도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할 ‘작품’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물감으로 할지, 유화로 할지, 파스텔로 할지 재료를 고민합니다. 재료가 그림의 질감과 정취를 결정합니다. 재료는 수단이라기보다는 목적입니다. 형식 속에 내용이 녹아 둘을 분리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그림의 재료가 그렇다면, 글쓰기에서는 문장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길이와 상관없이 문장만으로 그걸 읽는 독자가 감각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느냐가 중요하겠죠. 내 문장에 서러움, 비탄, 상실감, 패배의 감정이 있느냐 하는 문제겠죠. 서러움이 없으면 문장이 나오지 않습니다(제가 글을 잘 못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글쓰기에 대한 감각은 문장에 대한 감각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세상과 생각을 어떻게 문장에 담을 건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세상이 목적이 아닙니다. 글이 목적입니다. 문장이 목적이지, 설득이나 교훈 같은 효과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니 한 편의 글에는 적어도 하나의 문장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계가 굴러가는 규칙과는 다른, 예술의 경지에 육박한,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이 있어야 합니다. 글을 쓴다는 건 좋은 문장을 하나 뽑아내는 겁니다.
앞에서 군악대 퍼레이드와 새떼 얘기를 길게 했는데요. 우리에겐 새떼의 감각이 필요합니다. 글의 시작은 어떻게 하고, 강조하고 싶은 대목은 어떻게 하고, 문장의 길이는 어떤 게 좋고 하는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세요. 대신 내 생활세계에 어떻게 문장으로 감응할까, 이 상황을 문장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글’이 아닙니다. ‘어떤 문장’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예술로서의 글쓰기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걸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계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지만, 글을 통해 이 세계를 초월하고 넘어섭니다. 예술은 단독성을 추구합니다. 공통성을 추구하는 건 예술이 아닙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글도 예술이어야 합니다.
격언처럼 명료하게 떠올릴 수 있는 문장이면 길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이사’라는 글감으로 여덟 편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역시 이사는 한 사람이나 가족에게 중요한 매듭이자 계기 역할을 하더군요. 삶이라는 냇물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 같은.
부산으로 이사 갔더니 학교 친구들이 서울깍쟁이라 놀렸는데 금세 친해져서 자신도 ‘부산 가시내’가 되었다는 사연(리아님), 비참했던 어린 시절을 이겨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반지하에서 새 보금자리로 이사하던 날의 기분(ley1105님), 한집에 살면서 자녀들의 이런저런 아픔을 지켜보다가 모두 떠나보내고 다른 거처로 이사하기 전날 남편과 밤을 보내는 소회(숙연님), 35년을 아파트에서 살다가 시골로 이사 갔을 때의 기쁨(혜욱님), 하나의 직업으로 일하며 30년을 살던 집을 정리하고 낯선 공간으로 이사하면서 느끼는 회한(덕희님), 옥탑방으로 이사하는 날 의리 있는 친구들이 왁자지껄 도와주며 보냈던 즐거운 시간(은광님), 작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물건을 줄이고 단출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정선님), 중학생 때 이사하면서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며 소중한 물건을 마구 쓸어 담는 걸 보며 느꼈던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담이님).
독자 글에는 다양한 사연이 담깁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난관을 겪은 분도 많습니다. 그 우여곡절을 견디며 살아온 분들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낍니다. 저는 밑줄을 치며 읽는 버릇 때문에 글을 빨리 읽지 못합니다. 그런데 독자님들이 보내준 글을 읽으면서 주로 사연에 밑줄을 치고 있더라고요. 물론 사연의 줄거리도 중요합니다. 다만 조금 욕심부리자면, 이젠 ‘와, 이런 문장도 있구나!’ 하는 글을 보고 싶긴 합니다. 내 사연을 문장으로 어떻게 전환할지, 그 기억의 단편을 문장으로 간결하게 담는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에 좀더 신경 쓰길 바랍니다. ‘사연을 보낸다’에서 한 걸음 나아가 ‘작품’을 보낸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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