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전북 전주로 내려와 허송세월했다. 학교를 다른 지역에서 다닌 탓에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 애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애는 초등학교 동창의 고등학교 친구였다. 초등학교 동창이 ‘버디버디’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에 대뜸 그림 그리는 친구라며 그 애를 초대했다. 둘 다 예술대학을 지망하니 알고 지내면 좋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대학에 떨어져 궁여지책으로 경기도 화성에 있는 한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되레 감지덕지하며 다녀야 할 판이었다. 당시 현대시를 가르치던 교수님은 매주 연구실에 나를 불러 설익은 습작을 합평해줄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자퇴서에 서명받으러 갔을 때는 조금 더 고민해보라며 끝까지 도장을 찍어주지 않으셨다. 기어이 다른 교수님께 확인받아 서류를 냈다. 몇몇 대학에 원서를 내고 결과와 상관없이 입대할 계획이었다.
부모님 눈을 피해 피시방에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 또래 친구들은 대학생활에 열심이었다. 불현듯 그 애가 전주에 산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어떻게 연락했는지 아리송하다.
그 애는 미술대학에 들어갔는데 전공이 안 맞아 다른 대학을 알아본다고 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빛나는 눈으로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 뒤로 자연스레 자주 시간을 보냈다. 주로 대학가를 걸으며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은 걷다가 지쳐서 아스팔트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그 시절 꿈꾸던 미래는 오지 않았다. 아니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었든. 나는 거처를 여러 번 옮기며 다른 삶을 살았다.
전유동의 두 번째 정규앨범 《나는 그걸 사랑이라 불러 자주 안 쓰는 말이지만》은 오래된 미래에서 온 편지 같다. “지금을 아주 그리워하게 될 거야”(<토마토>) 하고 노래하는 그는 철새가 도래(渡來)하듯 우리가 밤을 건너고 시간을 넘어 “내가 있는 이곳”(<강변>)으로 오길 기다린다. 어떤 사랑은 뒤늦게 밀려온다.
한 선배가 ‘작가와의 만남’에서 많이 배우면 많이 잊어버린다고 말했다. 타고난 리듬과 어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길들여진 ‘나’가 자리잡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내게도 허무맹랑한 꿈들이 있었다. 물러서지 않을 각오로 그 꿈들을 웅변했다. 그러나 나는 속되게 살아갈 뿐이다.
전유동은 ‘나’의 작음과 보잘것없음을 정직하게 마주한다. “잊고 지낸 이름들”과 “잊혀지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언제나처럼 흘러가는”(<아름 아름, 이름들 얼굴들>) 죄책감을 들춘다. 수많은 감정이 “점점 퍼지는 물결”(<호수>)처럼 마음을 가득 메운다.
미래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너와 나는 어떤 모습일까?
먼 친척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밤, 내가 이 세상에 온 의미를 곱씹었다. 의미는 뒤에 온다. 인간이 제멋대로 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지 않으려면 의미를 호명해야 한다.
그 애는 몇 번의 휴학 끝에 다니던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가게를 열었다. 서로 연락이 뜸해지다 소식이 끊겼다.
여름이다. “나는 가끔 울컥하겠지”(<나는 그걸 사랑이라 불러 자주 안 쓰는 말이지만>) 걷고 또 걸으며. 지나간 마음이 먼저 와 손짓한다.
최지인 시인
*너의 노래, 나의 자랑: 시를 통해 노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해온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최지인 시인의 노래 이야기. 3주마다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여성 군무원 살해·주검훼손 장교, 신상공개 결정에 ‘이의 신청’
목줄 매달고 발길질이 훈련?…동물학대 고발된 ‘어둠의 개통령’
야 “공천개입·국정농단 자백”…윤 시인하는 듯한 발언에 주목
[영상] 윤 기자회견 특별진단…“쇼킹한 실토” “김 여사 위한 담화”
윤, 김건희 의혹에 “침소봉대 악마화”…특검법엔 “정치선동”
‘1조원대 다단계 사기’ 휴스템코리아 회장 등 70명 검찰 송치
윤 “아내한테 ‘미쳤냐 뭐 하냐’…내 폰으로 아침 5시에 답장하길래”
11월 7일 한겨레 그림판
지구 어디에나 있지만 발견 어려워…신종 4종 한국서 확인
윤, 외신기자 한국어 질문에 “말귀 못 알아듣겠다”…“무례”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