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하고 복학했는데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니 새내기나 다름없었죠. 그때 저는 몹시 외로웠어요. 친구 사귀기가 어려웠거든요. 강의실 뒤편에 앉아 말없이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갔어요. 그러다 선생님 수업을 듣게 된 거예요. 제가 선생님께 시를 쓰고 있다고 했을 때 선생님 표정이 기억나요. 기대하는 표정은 아니었죠. 보여드릴 시를 고르면서 설렜어요.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이었거든요. 누군가에게 제가 쓴 시를 보여주는 거요. 그때 고른 시가 스무 편은 넘었을 거예요.
선생님과 매주 카페에 가서 시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자주 말이 없어졌죠. 그 시간이 답답하기도 했어요. 어떤 단어를 고쳐야 하고 어떤 문장을 빼야 할지 확실하게 가르쳐주길 바랐거든요. 선생님은 한 번도 그러지 않으셨죠.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하고 미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어요.
선생님은 자주 시인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셨죠. 절대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했을 땐 심장이 뛰었어요. 나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러곤 데뷔했고 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사에 들어가 일했어요. 사는 게 힘들 때마다 선생님 말씀이 생각났어요.
전북 장수에 간 적이 있어요. 선생님 고향이에요. 선생님은 수몰된 마을에 살았다고 하셨죠. 남은 흔적이 그것을 증명한다고요. 글이라는 게 사라진 것을, 사라지고 있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주 길을 잃을 것이고 길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게요.
신승은의 두 번째 정규 앨범 ‘사랑의 경로’는 우리 삶의 여러 길을 보여줘요.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우리가 광장에서 만나 거리를 행진하며 사람의 말을 외칠 때,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되었어요.
귀찮지는 않으셨나요. 매주 시간을 내어 시를 봐주는 거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제가 쓸쓸해한다는 걸 알고 계셨죠? 창가에 앉아 바깥을 보다보면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곤 했어요. 창은 문이면서 벽이고 통로면서 마음이에요. 선생님에게도 풀리지 않는 일이 있겠죠. 가을은 아무도 모르게 와요. 엇갈리는 마음처럼요. 어떤 날은 엉킨 실타래 같아요.
아이들이 철봉에 매달려요.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철봉에 매달려 몸을 늘이고 있어요. 어른이 되면 어른의 옷을 입고 어른의 말을 하며 어른의 사랑을 할 거라고 믿는 아이들이 이제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요. 뒤집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랑을 잘해보고 싶어”(‘쇳덩이’)라던 신승은은 “신으로 태어난다면 하고 싶은 일 딱 한 가지 그댈 사랑만 하고 바라지 않는 거야”(‘내가 신으로 태어난다면’) 하고 노래해요. 몸이 작아지면 그만큼 세상이 크게 보이겠죠? 앉아만 있었을 뿐인데 몸이 커진 기분이에요. 저는 오랫동안 내가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했어요.
이제 우리는 자주 만나지 않아요. 광장에도 나가지 않고요. 오래전에 쓴 편지를 이제야 부쳐요. 스승이 있다는 건 복된 일이에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흘러가게 둘게요. 목적지는 다다르지 못한 곳이죠. 세상에는 그런 곳이 무궁무진해요. 내 마음은 네 마음을 지나 새의 마음을 지나서 살아내고 있어요. 사라지지 않으려고요.
“우리는 도시의 병 한두 개쯤은 갖고 있지. 남모를 마음의 병 두어 개 정도 앓고 있지.”(‘안음’)
최지인 시인
* 너의 노래, 나의 자랑: 시를 통해 노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해온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최지인 시인의 노래 이야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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