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을 내기 전 서울 동교동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선배 시인이 먼저 들어가 편집 일을 하고 있었다. 선배와 계단에 앉아 수다를 떨던 시간을 떠올리면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둘 다 그 회사에 오래 다니진 못했지만 그 시절은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시집 출간을 앞두고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고 선배는 글쓰기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선배가 조그만 돈가스집을 차리고 싶다고 했던 것, 서점을 열고 싶다고 했던 것, 커피콩 볶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던 것,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선배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파도를 쫓는 사람의 책을 편집하고 있었다. 책에 들어갈 사진에는 서프보드를 든 남자의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작은 파도와 더 큰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건널목에 서 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다보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그중 하나가 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온다는 말이다. 그것이 참이라면 삶이라는 여정은 고비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작은 결실에 자신만만하다가도 의기소침해지는 게 순리일 것이다.
오락실에서 프로거(Frogger)라는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제한 시간 내에 개구리를 조작해 목표 지점에 이르게 하는 게임이다. 개구리는 집에 가기 위해 자동차들이 달리는 5차선 도로와 짙은 색의 강을 건너야 한다. 차를 피해서 제법 안전한 수풀까지는 그럭저럭 닿았다. 거북이와 통나무가 흘러가는 강을 건널 때가 문제였다. 내 개구리들은 오염된 물에 빠져 목숨을 잃기 일쑤였다. 사실 이 게임은 끝이 없다. 개구리 다섯 마리가 보금자리에 이르면 경쾌한 비지엠이 흘러나오고 다시 게임이 시작된다. 패턴에 익숙해지고 적응할라치면 뱀과 악어와 같은 새로운 장애물이 나타나고 게임의 속도가 빨라진다. 주어진 목숨을 다 잃을 때까지 길을 건너고 또 건너야 한다.
한 사람의 작품 목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더듬는 경험은 그가 마주한 수많은 고비를 헤아리게 한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모두 크고 작은 시련을 겪었다.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난 이도 있지만 가라앉고 가라앉으며 생을 마감한 이도 있다. 그 내력을 내 것과 견주며 앞을 짐작하는 게 내 버릇이다.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었다고 얘기할 때가 올 거라 믿으며.
비틀스의 마지막 정규 앨범 《애비 로드》(Abbey Road)의 재킷은 그들의 다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앨범 제목과 그룹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재킷에는 건널목을 건너는 네 사람의 모습이 담겼다. 1985년 7월 강원도 원주에서 장인어른은 오아시스레코드사가 수입해 판매한 《애비 로드》 엘피를 샀다. 재킷에 볼펜으로 당신 이름을 한자로 적고 그 아래 날짜와 도시 이름을 적었다. 삼십여 년이 지나고 그것을 사위에게 주었다.
당신이 건넜을 고비, 내가 건너야 할 고비.
스물네 살의 당신이 턴테이블에 엘피를 거는 모습을 그려본다. 애플 레코드의 초록색 사과가 천천히 회전하고 바늘이 홈을 따라 돌면서 〈컴 투게더〉(Come Together)의 전주가 흘러나온다. “모두 모여 지금 당장 내 곁으로” 존 레넌의 목소리를 들으며 당신은 전율을 느꼈을까. 스피커에서 타닥타닥 장작 타는 듯한 소리가 난다.
최지인 시인
*너의 노래, 나의 자랑: 시를 통해 노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해온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최지인 시인의 노래 이야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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