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왕자웨이) 감독의 2000년 작 <화양연화>는 주모운 역을 맡은 양조위(량차오웨이)가 매미 울음으로 들끓는 앙코르와트, 어느 구멍 난 벽에 비밀을 속삭이고 진흙으로 봉한 뒤 폐허가 된 사원을 빠져나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 장면을 흉내 내어 나무 구멍에 입을 대고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다.
왕가위 영화를 보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흔히 그를 ‘작가주의 감독’이라 하는데, 중학생인 나는 그 말을 좋은 영화를 찍으려면 작가가 돼야 한다는 말로 잘못 알았다. 텔레비전에서 ‘네이버 지식검색’ 광고를 할 때였고 ‘지식iN’에 물어보니 ‘어느 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야 한다’는 답이 달렸다. 2003년이었다. 그 해를 정확히 기억하는 건 장국영(장궈룽)이 세상을 떠난 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장국영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비디오방을 들락날락하며 그가 출연한 영화를 빌려 보다가 왕가위 감독을 만났다.
중학생 시절, 시험기간이 되면 한 친구와 독서실을 다니곤 했다.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다 따분해질 때면 이따금 공책에 시를 끄적였다. 사랑에 관한 시였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에 관한 시를 참 많이 썼다. 어쩌다 친구에게 시를 보여주게 됐다. 처음으로 또래 친구에게 내가 쓴 시를 보여준 거였다. 그 친구가 시를 읽고 무슨 말을 해줬는지 가물가물하지만 그 뒤로도 종종 시를 보여줬다. 누군가에게 시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시 쓰기를 계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복다진의 두 번째 정규앨범 《너만 알고 있지》는 세상을 향한 질문으로 가득하다. 모르는 세계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몇 해 전 서울 강남구에 있는 보육원 70주년 행사에 복다진과 함께 참여했다. 복다진은 아이들 앞에서 전자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 불렀다. 그 경험은 이번 앨범의 수록곡 <나무>를 만드는 데 토대가 됐다. 나는 보육원 아이들을 만나며 이 세상에는 결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걸 아련히 느꼈다. 복다진에게 노래하는 것은 “이 세상에 의문을 남기는 거” 같다. “어떤 것도 대답을 들을 순 없지만 계속해서 좇아갈 거”(<물음>)라고 마음을 다진다.
예술을 한 가지로 정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예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몸과 마음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이란 형식이 몇천 년 동안 변화했지만 그 변화 속에서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 탐구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내게 시는 삶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며 이 세상을 향해 질문하는 형식이다. 시 쓰기에서 중요한 감정은 이상한 기분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그 기분이 어디서 왔는지 끈덕지게 구하다보면 ‘왜’라는 질문에 이르게 된다.
타이틀곡 <파도>는 복다진의 음악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곡이다. 담담한 목소리로 “나는 거친 파도예요” “도망칠 수는 없어요” 하고 노래하는 부분은 끝없이 밀려오는 삶의 풍랑에 몸을 맡긴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얼마 전 자기 이야기를 시로 적어 사람들에게 들려준 한 분이 생각났다. 그는 불거져 나오는 울음을 짓누르며 끝까지 시를 읽었다. 계속되는 파도가 우리를 지금, 여기로 이끌었다.
김환기는 1969년 10월6일 일기에 “늘 생각하라. 뭔지 모르는 것을 생각하라”(‘Whanki in New York’, (재)환기재단, 2019)고 적었다.
작은 구멍에 대고 노래하고 싶다.
“똑똑하고 심장을 열어보니 엉엉하고 눈물이 쏟아졌네”(<비>)
최지인 시인
*너의 노래, 나의 자랑: 시를 통해 노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해온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최지인 시인의 노래 이야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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