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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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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의 반쪽 리얼리즘, 영화 ‘토리와 로키타’

서사는 단순해지고 개연성은 희미해지고 추상적 가치 추구만 남아
등록 2023-05-19 07:41 수정 2023-05-25 01:38
영화 <토리와 로키타>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토리와 로키타> 영화사 진진 제공

*이 글에는 영화 <소년 아메드>와 <토리와 로키타>의 스포일러가 포함됐습니다.

벨기에의 형제 감독 장피에르 다르덴과 뤼크 다르덴의 영화는 제도 바깥으로 내몰린 미성년자의 거친 현실을 주요 화두로 삼는다. 밀입국 브로커를 아버지로 둔 소년(<프로메제>), 알코올중독자 엄마와 비좁은 트레일러에 사는 소녀(<로제타>), 암시장에 팔린 아기(<더 차일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자전거 탄 소년>), 다급하게 병원 문을 두드리다 결국 변사체로 발견된 익명의 소녀(<언노운 걸>). 그들은 극심한 빈곤 속에 가족과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르덴 형제의 세계는 무방비한 몸으로 길 위를 떠도는 아이들 장면을 통해 이들 삶의 조건을 압축적으로 재현해왔다. 인물에게 바짝 붙어 위태로운 행로를 쫓는 핸드헬드 촬영은 이들의 현실과 내면의 급박함을 미화 없이 체감하게 하는 장치로 여겨졌다. ‘나’의 카메라는 인물이 놓인 물적 토대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피사체 가까이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이 질문에 대한 다르덴 형제의 굳건한 태도로 이해되곤 했다.

축소된 현실과 행동반경에 고립된 아이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여전히, 태도인가. 다르덴 형제의 근작들이 그 반문을 불러일으킨다. 다르덴 형제의 세계는 이전보다 간결해진 서사구조 안에서 이야기의 개연성을 설득하기보다 그들이 구하려는 가치를 집약하는 데 점점 더 몰두한다. 인물에 집요하게 근접한 카메라의 운동은 그 가치를 설파하려 그의 현실 지평과 행동반경을 축소하며 상황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에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

근작들에서 다르덴 형제가 핸드헬드 촬영으로 구축한 프레임은 아이들을 그 속에 고립시켜 기능적으로 전시한다는 인상을 자아내기도 한다. 2019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소년 아메드>, 그리고 2023년 전주영화제 개막작인 <토리와 로키타>가 다르덴 형제의 화법에 그런 의심을 배가한다.

<소년 아메드>에서 ‘아메드’는 이슬람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자신을 가르쳐온 선생님이 배교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 날 아메드는 부엌칼로 선생님을 찌르려다 실패하고 소년원으로 이송된다. 그곳에서도 주도면밀하게 공격 기회를 노리더니, 마침내 탈출해 다급히 선생님 집으로 향한다. 영화는 한 소년을 광신도로 전락시킨 지난 사연이나 소년의 내면을 궁금해하지도, 제시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다르덴 형제의 핸드헬드 촬영은 이런 맥락을 화면 바깥으로 밀어내며 오로지 소년의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신념, 나아가 광기의 움직임만을 반복해 현시하는 데 목적을 둔다. <소년 아메드>의 소년에게는 서사가 부여되지 않는다.

토리와 로키타의 모습. 영화사 진진 제공

토리와 로키타의 모습. 영화사 진진 제공

다르덴 형제는 이런 선택에 대해 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지는 이유보다 그것을 결국 극복해내는 문제가 더 시급했다고 밝힌다. 인물에게서 서사적 가능성을 모조리 제거하고 사악한 표면만 남겨둔 영화는 그 인물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을까. <소년 아메드>의 마지막 장면이 이에 대한 대답이다. 아메드는 날카로운 꼬챙이를 챙겨 선생님 집 지붕에 올라 창문으로 진입하려다 한순간 바닥으로 추락한다. 아메드는 일어나지 못한 채, 겨우 손을 뻗어 철문을 두드리고 그 소리를 듣고 집에서 나온 선생님과 대면하자 용서를 빈다. 선생님이 응급차를 부르러 간 뒤, 화면에는 소년의 마비된 몸만 덩그러니 남는다. 이 결말의 단호한 단순함은 무섭다.

<소년 아메드>의 마지막 장면은 악행을 범한 손이 용서를 비는 손에 이르는 도덕적 전환에만 정신이 팔려 소년을 덮친 물리적 고통에 놀라울 정도로 무심하고 냉담하다. 달리 말해, 이 영화는 “초자아를 향한 열세 살 소년의 맹목적 복종과 극단적 수동성의 상태를 끝내기 위해 그를 육체적 수동성의 상태로 무력화하는 방법”(<필로> 제16호)을 택한다. 구조를 요청하는 소년의 한없이 절박하며 나약한 손짓 앞에서 영화가 떠올린 구원이라는 가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것은 구원이 아닌 처벌이다.

벼랑 끝 현실 보여주는 것만으로 무얼 얻나

안타깝게도 <토리와 로키타>는 <소년 아메드>의 결말에서 감지된 다르덴 형제 세계의 위험성을 재차 확인하게 한다. 열여섯 살 로키타와 열한 살 토리는 같은 쉼터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다. 그들은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친남매 이상의 관계로 서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한다. 로키타는 고향의 아픈 엄마와 동생들을 부양하는 한편 토리의 교육비도 책임지려 하지만, 체류증이 없어 합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둘은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백인 남자 베팀에게 마약을 받아 배달하는 일로 돈을 번다.

<토리와 로키타>는 <소년 아메드>보다 단선적인 서사의 흐름을 고수한다. 이 영화는 생존을 위해 밤거리를 오가는 두 아이의 동선과 이들을 착취하는 성인들의 얼굴로 이분화된다. 쉼터의 어른들이 잠시 등장하지만, 아이들의 서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신, 로키타를 감시하며 돈을 갈취하는 악덕 브로커, 아이들을 마약 밀매에 이용하며 로키타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는 남자, 이들에게 마약을 사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 없는 성인들이 두 아이의 일상을 옥죈다. 사방에 안타고니스트(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만 포진한 출구 없는 시공간에 두 아이의 연약한 육체가 내던져진다.

<토리와 로키타>는 애초 인물들에게 어떤 서사적 도약도 허락하지 않는 철저히 닫힌 세계다. 다르덴 형제는 토리와 로키타의 현실이 체류증을 얻지 못한 난민 아이들에게 실제 벌어지는 일이라며 이러한 설정의 불가피성을 언급한다. 그들은 아이들의 상황을 또다시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영화의 일방적 방향성을 ‘리얼리즘’으로 방어한다. 이 과정에서 무엇을 새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들이 여러 인터뷰에서 내세운 답은 우정이다.

영화 <소년 아메드>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소년 아메드>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핸드헬드는 더 이상 태도가 아니라 스타일

저열하고 폭력적인 성인들 틈에서 두 아이가 끝내 보존한 숭고한 우정. 후반부, 영화의 충격적인 선택을 보고 난 뒤, 다르덴 형제가 강변한 메시지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로키타는 난민 신청 심사에서 떨어지고, 어쩔 수 없이 베팀의 제안을 받아들여 마약 재배소에서 홀로 3개월 동안 숙식하고 일하는 대가로 위조 체류증을 얻기로 한다. 그러나 토리와 로키타는 이별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토리가 베팀의 차 뒷좌석에 숨어 로키타가 갇힌 장소를 알아내고, 둘은 위태롭게 재회한다. 급기야 토리는 로키타를 돕기 위해 이곳의 마약을 훔쳐 베팀 모르게 팔기까지 한다.

이 지점부터 영화에는 아주 단순한 물음만 남는다. 두 아이의 행각은 발각될까. 그들은 탈출에 성공할까,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토리가 마약 재배소에 잠입하는 장면, 베팀이 그곳에서 토리와 로키타를 붙잡는 순간, 이들이 겨우 그 공간을 빠져나오는 과정, 로키타가 토리를 숲에 숨겨두고 다친 몸으로 히치하이크를 시도하는 대목이 긴박한 추격전 양상으로 연결된다. 이 행로를 다급히 따라가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더 이상 이들의 현실 조건에 밀착해보려는 태도가 아니라, 그저 서스펜스를 양산하는 스타일로 기능할 뿐이다. 다르덴 형제가 아무리 ‘리얼리즘’에 호소해도 여기서 극을 추동하는 힘은 다분히 장르적 긴장감이다. 그 끝에 로키타의 죽음이 있다.

이 죽음은 누구의 책임일까. 아마 영화는 로키타를 단숨에 쏴 죽인 마약조직원, 그로 대변되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 죽음의 원인이라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는 이를 설득해내지 못한다. <토리와 로키타>는 로키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회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보다 그의 고통을 대상화하며 죽음을 감상적으로 의미화하는 데 자족하는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인다. 뤼크 다르덴은 갑작스러운 죽음의 결말을 “우정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토리를 살려낸 로키타의 헌신적인 모습”(<씨네21> 제1405호)으로 정리한다.

형 장피에르 다르덴(왼쪽) 동생 뤼크 다르덴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

형 장피에르 다르덴(왼쪽) 동생 뤼크 다르덴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

우정의 고결함 말하려 모순된 현실 단순화

<소년 아메드>에서 종교적 극단주의의 ‘극복’을 형상화하기 위해 소년을 가차 없이 추락시키던 다르덴 형제는 이제 ‘우정’의 고결함을 말하기 위해 소녀를 죽이고 만 것인가. 아무리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가 아이들 곁에 수평적으로 밀착해도, <소년 아메드>와 마찬가지로 <토리와 로키타>에서 그 시선은 아이들의 현실을 내려다본다. 이 영화는 ‘우정’이라는 개념을 더없이 유해한 세상에서 추출한 무해한 가치로 순화하며 정작 아이들이 우정으로 버텨내던 모순된 현실을 단순화한다. 그 가치를 고양하고 추상화하기 위해 정작 아이들이 지켜내던 우정을 잔인한 죽음으로 희생시킨다. 그러니 로키타를 살해한 총을 쥔 손이 다르덴 형제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겠는가.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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