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들이 흔히 까먹는 게 있습니다. 나는 보았지만 독자는 보지 못했다는 것. 나는 느끼지만 독자는 느끼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독자는 현장에 없었다는 것. 그 차이를 잊으면 자기 경험을 간단하고 추상적인 말로 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엄청 재미있다’ ‘감동적이었다’고 쓰거나, 음식을 먹고 와서 ‘맛있다, 강추!’라고 합니다. 독자는 영화의 재미와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없죠.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직접 경험한 사람이야 ‘재밌다, 맛있다, 멋있다, 예쁘다, 잘생겼다, 슬프다, 기쁘다, 시끄럽다, 조용하다, 걱정이다, 부끄럽다, 두렵다’라고만 해도 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실감 나게 다시 떠오르지만, 아쉽게도 독자는 별다른 공감 없이 (전속력으로) 지나쳐버립니다.
묘사는 도처에서 사용됩니다. 모든 걸 다 묘사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두 다.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도 묘사할 수 있고, 사건도 묘사할 수 있고, 생각도, 대상(인물)의 성격도 다 묘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묘사입니다. 다만 ‘친절한 묘사와 불친절한 묘사, 또는 매력적인 묘사와 매력 없는(그저 그런) 묘사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부끄러웠다’라는 표현도 묘사입니다. 독자에게 그 감정이 전해지지 않아 불친절한 묘사일 뿐입니다. 친절한 묘사는 부끄러움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얼굴이 붉어진다거나 땀이 난다거나 마른침만 삼킨다거나 엄지손가락을 쥐어뜯는다거나 괜히 과하게 웃는다거나 하는. 장면이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면 독자의 머릿속에 ‘비스름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할까요?
다음 사진의 장면을 글로 묘사한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쓰시렵니까?
흔하게는 맨 왼쪽부터 한 사람씩 훑어오는 거죠. ‘왼쪽 첫 번째 회색 중절모를 쓴 노인은 뭔가를 말하고 있고 그 옆에 앉은 노인은 웃음 띤 얼굴로 얘기를 듣고 있다. 세 번째 노인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네 번째 노인은 그 반대 방향을 쳐다보고 있다. 다섯 번째 노인은… 여섯 번째 노인은… 일곱 번째 노인은 책을 읽고 있다.’ 이런 식으로 복사하듯이 죽 훑으면서 다 언급하면 묘사가 잘된 걸까요(묘사되긴 된 겁니다만!). 앉아 있는 노인이 일곱이 아니라, 백 명이면 어쩌시렵니까. 다 읊기만 해도 단편소설 한 편 분량은 나오겠는데요.
‘묘사하라 해서 했더니 또 딴소리네. 뭘 어쩌란 말이야!’라고 하시겠네요. 일단 눈에 보이는 걸 글로 옮긴다고 묘사가 잘되는 건 아니다, 정도로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갑시다.
예를 하나 더 보죠. 다음 글은 노래를 잘하는 초등학생이 양로원에 공연하려고 갔는데, 강당을 가득 메운 노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입니다. 어떤 분위기가 느껴지는지 주목하면서 읽어보세요.
① 맨 앞줄에는, 노인 한 사람이 이미 오래전에 모든 과일들을 다 떨구었는데도 사람들이 흔들고 또 흔들어대는 한 그루 사과나무처럼 경련을 못 이겨 전신을 흔들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② 또 어디선가는 속이 빈 고목의 그루터기 속에 갇힌 바람인 양 거친 휘파람으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③ 또 다른 노인 하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를 따라 뛰고 있었다. ④ 홀 한가운데 어디선가에는 반신불수의 남자가 생기 없는 얼굴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⑤ 어느 가엾은 여자는 부풀어 오른 살의 거대한 무더기에 불과하다는 인상이었다. ―가브리엘 루아, <내 생애의 아이들> 중에서
어떤 느낌이 드나요? 도저히 공연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 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늙고 병든 사람들의 애잔한 정서가 느껴지나요? 중요한 것은 강당을 가득 메운 노인 중에서 오직 다섯 명의 노인만을 묘사했다는 겁니다. 그렇게만 해도 어떤 ‘분위기’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구구절절 자세히 쓴다고 묘사가 잘되는 게 아닙니다. 묘사는 ‘독자’(저자가 아닙니다!)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경험과 비슷한 걸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부끄러웠다’고만 써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부끄럽다’는 감정을 독자도 함께 느낄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좋은 글은 독자에게 저자가 느낀 정서를 느끼도록 합니다.
그러고 보니 묘사를 잘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네요. 첫째, 글쓴이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느낀 감흥이 있어야 합니다. ‘사로잡힘’. 이게 먼저입니다. 감흥은 뭔가에 사로잡혔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묘사하려면 내 마음을 사로잡는 감정, 내 마음에 아로새겨지거나 솟아나는 게 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기쁨, 즐거움, 슬픔, 설렘, 낯섦, 호감, 다정함, 서먹함, 걱정, 분노, 무심함, 뭐 이런 느낌이나 이미지들 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앞에서 본 사진에 대해 글을 쓰라면, 잘 못 쓸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선 저를 사로잡을 만큼 충만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저 장면을 글감 삼아 글을 써야 한다면, 시간을 내서 저 현장에 가볼 겁니다). 그게 없으면 묘사하기가 어렵습니다. 묘사는 기교가 아닙니다. 기교일 수가 없습니다. 묘사는 주장에 가깝습니다. 내가 주목한 것에 당신도 주목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느낀 걸 당신도 느껴! 다른 건 보지 말고 내가 보라는 것만 봐! 그러니 감흥이 없다면, 독자의 심장을 제대로 겨눌 수 없습니다. 묘사의 핵심은 교과서에 나오듯이 ‘그림 그리듯이’도 아니고 ‘생생하게’도 아닙니다. ‘감흥’ ‘사로잡힘’입니다.
둘째, 그런 감흥을 일으키는 요소를 찾는 겁니다. 어떤 감정이나 이미지, 느낌을 갖게 하는 요소가 뭔지를 찬찬히 생각해보는 겁니다. 앞의 사진에서 ‘노년의 헛헛함’을 느꼈다면 그런 감흥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인지, 주름살 때문인지, 모자와 신발 때문인지, 표정 때문인지, 앉은 자세 때문인지, 도로변이라는 냉정한 공간 때문인지 찾아보는 거죠.
내가 어떤 감흥을 받았다면 그런 느낌을 자극하는 요소가 ‘선택’된 겁니다. 선택이란 말은 당연히 선택하지 않고 지나치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양로원 강당에 모인 노인들을 보면서 ‘애잔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 결정적인 대상을 택하고 나머지 요소는 (아쉽겠지만) 쓰지 않는 것입니다. 묘사는 ‘선택’하는 작업입니다.
감흥을 곧바로 토로하는 게 아니라, 그 감흥의 기원을 더듬으려고 해야 합니다. 감정을 곧바로 보이는 게 아니라 그런 감정을 갖게 한 것을 보여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묘사는 유보적 태도를 길러줍니다. 뭐든 떠오르는 대로 내뱉는 게 아니라, 숨을 한 번 더 쉬고 ‘무엇이 이런 감정을 갖게 했을까?’ 묻는 습관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묘사는 간접성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갖습니다. 감흥은 보여줄 수 없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는 등의 감각적인 것들로 대신 나타낼 수 있을 뿐입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 ‘현장’이 중요한 것은 대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뿐만 아니라 코, 귀, 손, 혀 모두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감각이 동원될지는 모릅니다.
비록 감흥과 요소 찾기를 선후로 나눴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선후가 없습니다. 동시에 일어납니다. 감흥이 일어나려면 뭔가를 대면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뭔가에 사로잡힐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경험이 먼저일까요? 경험이 많다고 뭔가에 잘 사로잡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딱 그렇습니다. 저는 좋은 경치를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못 느낍니다. 옆 사람은 깊은 탄성을 지르는데도 저는 그저 무덤덤하게 쳐다볼 뿐입니다. 농반진반으로 태백산맥 한가운데서 호연지기를 키웠더니 이 정도 경치는 별로 놀랍지 않다고 변명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감탄의 정서를, 감탄의 의지를, 감탄의 감각, 사로잡히려는 용기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묘사는 대상을, 세계를, 현재를, 감정을 만끽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만끽하고 나면 친절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새겨지지 않아서 잘 못하는 겁니다. 마음에 새겨진 걸 풀어내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감각을 총동원해서 대상을 만끽해야 합니다. 어제보다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체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됩니다.
무감각한 저에 비해, 전남 완도에 사는 황화자 할머니는 ‘그리움을 만끽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썼습니다.
‘유방암 진단받은 나한테/ 남편이 울면서 하는 말,/ “5년만 더 살어.”// 그러던 남편이/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손주 결혼식에서 울었다./ 아들이 동태찜 사도 눈물이 났다./ 며느리가 메이커 잠바를 사줄 때도 울었다.// 오직 한 사람 남편이 없어서.’ ―황화자, ‘오직 한 사람’
눈물이 날 때가 저 때뿐이겠습니까. 할머니는 ‘그리움’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그 그리움의 근원을 충분히 관찰했기 때문에 ‘손주 결혼식, 동태찜, 메이커 잠바’ 같은 구체적인 상황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저는 아직 ‘죽은 남편’ 처지도 아닌데, 저 글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글쓴이가 이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독자도 함께 그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묘사는 기교가 아니라, 사로잡힘입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독자 글>
지난번 글감은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였습니다. 모두 아홉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아이들 출석 부르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이름이 많아졌습니다. 도희, 숙연, 혜욱, 정미, 정선, 지은, 은광님, 이대로 쭉 갑시다!(혜욱님의 길고도 안타까운 사연, 반전의 재미가 있더군요.) 원형, 선옥님 첫 글 잘 읽었습니다.
짧게라도 글 소개를 못하고 지면 관계상 뭉뚱그려 얘기하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글에는 조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을 ‘사진 찍듯이’ 포착하는 글을 써보라는 것이었죠.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를 기억합니다. 잘 안 해본 게 시간을 멈춰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고 주문하고 차 마시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계산하고 나오는 건 분명히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이어지는 건데, 시간이 멈춘 것처럼 생각하라고 하는 건 부자연스럽죠. 그러니 순간을 쓰는 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사진 찍듯이 순간을 포착하는 글을 연습하는 것은 이렇게 할 때 오감을 동원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묘사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멈추지 않으면 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 중심으로 쓰게 됩니다. 시간을 멈춰 세워야 그 사람의 모습이나 한 일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냄새, 감촉, 그 사람이 몰고 들어온 바람, 그 사람 등 뒤에 비치던 햇빛, 안경에 서린 김, 찻잔을 휘감는 커피향 같은 것들을 묘사하게 됩니다. 시야가 넓어지고 감각이 다양해집니다.
신나게 놀다가 곤히 잠든 아이를 바라본다고 상상해보십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이는 멈춰 있습니다. 그냥 쳐다보기만 할까요? 아이의 손과 발을 만져보기도 하고, 뺨과 머릿결을 쓰다듬기도 하고, 냄새도 맡아보지 않을까요. 아이의 어지럽혀진 방을 둘러보기도 하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느껴보겠죠. 시간을 멈춰야 나에게 ‘눈’ 말고도 코, 귀, 입, 피부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걸 적절히 곁들인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이 입체적이게 되죠.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다음 글감으로 글을 보내주기 바랍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여러 방식을 엿보고 싶네요. 책 한 권으로도 다 담지 못하겠지만, 이번에는 분량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주제: 나를 소개하는 글
분량: 1천 자 정도
마감: 2023년 3월26일 밤 12시
보낼 곳: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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