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숲속, 한 소녀가 산딸기를 따고 있는데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다. 소녀는 왕자에게 “기다리고 있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칼을 꺼내 백마를 베어버린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왕자에게 소녀는 당차게 말한다. “다른 여자애들이랑 달라서 놀랐니?”
새롭게 출시된 여전사 트레이닝 롤플레잉게임(RPG) <파이터 퀸> 광고 내용이다. 이 광고를 만든 사람은 JTBC 드라마 <대행사> 속 광고대행사 VC기획 CD(Creative Director) 고아인(이보영)이다. 드라마의 지향점을 미리 보여주는 듯한 이 광고는 “최초를 넘어 최고가 되”기 위해 “처절하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고아인과 닮았다.
고아인은 여러모로 특별한 이력을 가졌다. 도박과 술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와 그의 폭력에 시달리다 살기 위해 가출한 어머니로 인해 유년 시절부터 고모에게 맡겨져 학대받으며 자란, ‘흙수저’에 지방대 출신이다. 열심히 노력해 한국대(라고 쓰고 ‘서울대’라고 읽는다)에 붙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장학금을 못 받자 지방 국립대를 선택한 것이다. 이런 이력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의 사회생활이 평탄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성장 배경과 출신 학교가 곧 ‘신분’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다른 곳도 아닌 ‘한국대-남성’ 중심의 대기업에서 고아인이 살아남기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이름 고아인(高兒忍·고통도 외로움도 참고 참아서 결국 정상에 오르는 아이)에 담긴 뜻처럼 “돈시오패스”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돈과 성공을 추구하며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야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20년 동안 노력한 덕분에 고아인은 실력으로 견고한 유리천장을 뚫고 VC그룹 최초로 여성 제작본부장(상무)이 된다.
여기서 ‘실력으로’라는 표현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고아인이 최초의 여성 상무로 파격적인 승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VC기업 회장 딸, 강한나(손나은)가 임원으로 부임하기 전 세간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여성친화적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 ‘1년짜리 얼굴마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고아인의 실력이 그를 그 자리로 이끈 것은 맞지만, 최창수 상무(조성하) 등 고아인을 희생양 삼아 잇속을 챙기려는 이들이 그를 밀어올린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대행사>는 지금까지 나왔던 생존과 성공을 위한 모략이 난무하는 여느 ‘오피스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연 작가는 그러려고 고아인을 창조했을까? 고아인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대행사>는 2019년 방영된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검블유>)를 생각나게 한다. <검블유>가 정보기술(IT) 업계를, <대행사>가 광고대행사를 다뤘다는 면에서 다르지만, 능력 있는 전문직 여성들의 자기계발 서사라는 면에서 닮았다. <검블유>는 방영될 당시 전문직 여성들의 성공 욕망과 관계성을 주요하게 다뤄 큰 호응을 얻었다. 과연 <대행사>는 <검블유>와 어떤 면이 닮았고 다를까?
먼저 다양한 여성이 등장한다는 면에서 <검블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비슷한 직위의 세 여성이 중심이 된 <검블유>와 달리, <대행사>에는 카피라이터로 성공하고 싶은 욕망과 엄마 역할 사이에서 갈등하는 ‘워킹맘’ 조은정(전혜진), 실력은 뛰어나지만 트렌드에 맞게 외모를 가꾸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며 번번이 승진에서 누락된 배원희(정운선), 비정규직에서 벗어나 소속감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 최창수 상무의 지시대로 고아인을 감시하며 내적 갈등을 겪는 비서 정수정(백수희) 외에 ‘공주님’이지만 고아인과 적대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강한나를 통해 다양한 입장을 가진 여성들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고아인이 있다. 그는 지독한 워커홀릭에 그리 친절한 리더는 아니지만, 어느 ‘라인’에도 속하지 않는 비주류 직원들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편견 없이 존중하며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예외적 사례’로서의 고아인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곧 돌아올게”라며 떠난 어머니 서은자(김미경)에게 버려졌다는 상처를 안고 사는 인간,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에 의지한 채 잠을 줄여가며 프레젠테이션(PT)을 준비해야 하는 고단한 직장인의 고독과 불안도 함께 보여준다.
그렇기에 고아인은 ‘저렇게 되고 싶다’와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존재다. 드라마는 그런 고아인의 성공 서사이기도 하지만 성장 서사이기도 하다. 이런 고아인의 성공과 성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코끼리 같은 분?” 고아인의 오랜 동료, 한병수 부장(이창훈)이 이제 막 고아인 팀에 발을 들인 조은정이 고아인에 관해 묻자 한 대답이다. “코끼리가 지나가면 길이 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의 대답처럼 고아인의 이력은 업계에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기도 했다. 트렌드에 민감한 광고업계에서 ‘길을 내는 일’이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고아인은 관습을 흔드는 존재다. 우선 ‘흙수저’ 계급, 지방대 출신, 여성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이런 고아인의 존재감은 ‘한국대-남성’이 주류인 VC기획에 긴장과 갈등을 유발한다. 그들에게 고아인은 동료가 아니라 그저 불편하고, 심지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다. 그렇기에 자신의 ‘라인’을 형성해 서로의 안위와 승진을 위해 밀고 끌어주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한국대-남성’의 무리와 고아인은 수시로 대립한다.
고아인과 대립하는 이들은 남성 중심 사회의 ‘관습’을 상징한다. 최창수 상무가 중심이 된 그들은 정직하고 정당하게 일하기보다는 학연을 앞세워 수직적 위계를 형성한다. 고아인은 그에 대항하는 새로운 길, 즉 ‘혁신’을 의미한다. 그런 고아인이 상무가 되어 가장 처음 한 일은 인사발령이다. 고아인은 공채 출신 남성 팀장들을 팀원으로 강등한다. 이들이 강등된 이유는 단지 ‘공채-남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룸살롱에서 업체의 접대를 받는 등 “지저분한 일”을 “관례”라는 이름으로 지속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아인은 업계 관행도 개선하려 한다. 광고주들이 대행사 직원에게 금요일 오후에 업무 지시를 한 뒤 월요일 오전까지 제출하도록 요구하거나, 광고주 개인의 일을 대행사 직원에게 대신 하도록 지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고아인은 부당한 관행을 거부하겠다는 공문을 광고주들에게 전송한다. 당연히 광고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지만,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직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이런 고아인의 선택이 마냥 순수한 것은 아니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꾸준히 쌓은 문제의식이 없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일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고아인은 부당한 관습에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길을 내는 존재다.
고아인을 통해 또 하나의 여성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줬다고는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고아인과 대립하는 이들이 너무 전형적이다. 그들은 단지 ‘한국대-남성’이라는 이유로 멍청해도 되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처럼 행동함으로써 서사를 헐겁게 한다(일도 하지 않고 계략만 꾸미는데 해고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 또한 고아인의 어머니를 그의 약점으로 인식하고 악용하려는 이들의 존재는 한국 드라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 서사의 지겨운 반복이다. 극적 재미를 위한 설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21세기’에 굳이 ‘20세기’를 끼얹은 격이랄까. <검블유>에서 배타미(임수정)가 “내 욕망엔 계기가 없어. 내 욕망은 내가 만드는 거야. 상상도 못했겠지만”이라고 당차게 일갈한 지 어언 3년이 지났건만, 고아인에게 꼭 그런 전형적인 계기를 부여해야 했을까?
<대행사>는 이런 한계에 주저앉을 것인가, 고아인이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의 결말을 예측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이전보다 한발 나아간 또 하나의 여성 서사를 기대하며 이 드라마의 주 무대가 광고대행사인 점을 주목해본다. 대중의 욕망을 자극해 소비하게 하는 광고를 만드는 광고대행사는 그만큼 대중의 니즈(요구)를 잘 파악해야 하는 곳이다. 너무 앞서지도 않게 딱 반걸음 정도 앞에서 미래를 먼저 보여줌으로써 대중의 욕망과 선망을 자극해야 한다.
드라마는 대중의 흐름을 예리하게 읽어 새로운 길을 낸다는 점에서(그러지 못하면 외면당한다는 면에서) 광고와 그 운명과 지향이 비슷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행사>가 주목하는 대중은 누구일까? 1회 첫 장면이 드러낸 것처럼 ‘왕자는 필요 없는’ 여성 서사를 원하는 이들이 <대행사>가 주목하는 대중이 아닐까? <대행사>는 그런 이들에게 어떤 서사를 보여줄 수 있을까? 다양한 여성의 삶과 고민을 담고, 그들의 성공과 절망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걸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급진적’인 서사를 보고 싶다면 욕심일까?
과거와 싸워야 하는 이는 단지 고아인만은 아닐 것이다. 드라마를 만드는 이들도, 그걸 보는 대중도 마찬가지로 관습 혹은 시대의 한계와 싸우며 길을 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아인이 그 어떤 사연이나 계기도 없이 욕망하는 존재로서 자기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으며 동료들과 행복하게 일하는 걸 보고 싶다. 고아인뿐 아니라 고아인의 어머니도, ‘워킹맘’도, 비정규직·비사무직 노동자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를 보여주는 서사를 보고 싶다. 이렇게 쓰고 보니 고아인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 “내 한계를 왜 니들이 결정해?”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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