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다가 차갑게 식는다. 찢어지게 가난했다가 떵떵거리게 여유롭다. 말을 더듬다가 속사포로 쏟아낸다. 녹색 잎으로 물들어 단풍이 되고 잎을 모두 다 떼어냈다가도 어김없이 다시 꽃을 피워낸다. 천변만화의 계절을 신록처럼 쨍하게 표현한다. 배우 김신록이 그렇다.
<지옥>(2021)에서 죽음을 앞둔 자의 공포를 얼굴에 가득 담았던 박정자, <재벌집 막내아들>(2022)에서 자기 잘못을 가장 철없는 방법으로 풀어나가던 재벌 딸 진화영, <괴물>(2021)에서 경찰서의 괴물 같은 두 경찰 사이에서 인간적이던 경찰 오지화. 그가 대중에게 보여준 얼굴은 극단을 오간다. 영역을 넓혀온 것이 온전히 ‘인과적’이다. 연상호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김신록의 무당 연기를 <방법>(2020)에서 보고, 자기가 만든 배역임에도 “이렇게 중요한 역이었어?”라고 했고, 이 배역이 <지옥>과 <괴물> 출연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연기’로 주목받은 배우가 배우들을 만났다. <배우와 배우가>(안온북스 펴냄)는 “왜 배우에게 연기를 묻지 않는가”라는 김신록의 갈증에서 시작됐다. 김신록은 2019~2021년 연극배우 25명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2022년 다시 한번 더 배우들을 만나서 이후의 고민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들었다. <무빙>(디즈니플러스) 등의 공개와 <스위트홈2> <지옥2>(넷플릭스) 등의 촬영으로 바쁜 배우 김신록을 서면으로 만났다.
김신록은 <차이나는 K클라스>(JTBC)에서 연기자란 “물리적인 실재를 딛고 허구로 도약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그때마다 정의가 달라진다고 단서를 달았다. <배우와 배우가>에서 어린이 배우 김소원은 “(연기자란) 진짜가 아니라 가짜로 하는 거”라고 했고, 배선희는 배우를 ‘몸을 쓰는 노동자’라고 했다. “배선희 배우의 표현에 공감해요. 사실 직업을 막론하고 살아서 일하는 우리 모두는 몸을 쓰는 노동자잖아요. 다만 몸을 쓰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창의적인 직업이라 생각하는 작가나 작곡가, 화가 역시도 엄청나게 고되게 몸을 혹사하는 직업이잖아요. 오죽하면 ‘글은 엉덩이로 쓰는 거다’라는 말이 있겠어요.”(김신록)
김신록은 황혜란 편에서 “요새 저는 연기를 ‘인간을 보여주는 일’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배우의 몸으로 탐색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비슷하게 무대에 서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서 밝힌 ‘연결의 실천’이, 요즘 김신록이 생각하는 ‘연기란 무엇일까’의 답이 될 것 같다.
“극장을 찾아 무대에 서는 경험 혹은 객석에 앉는 경험은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굉장히 적극적인 ‘연결의 실천’인 것 같아요. 사실 연결 대신 접속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데요. 좀 어리둥절하실까봐 연결이라는 순화된 표현을 쓴 거예요. 하하. <차이나는 K클라스>라는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어떤 패널께서 ‘지옥에서 시연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내 등뼈가 휘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순간 역시 몸과 정신이 어떤 식으로든 깨어나고 반응하는, 활성화된 접속의 순간인 것 같아요. 극장에서는 그 연결과 접속이 실시간으로 더 전면적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겠죠. 그렇게 접속을 위해, 접속을 통해, 활성화된 몸과 정신의 상태 혹은 힘을 경험하는 것이 극장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상태 혹은 그 힘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겠다, 다른 인물을 이해해보겠다는 마음도 사실 이타적이거나 윤리적인 실천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접속을 통해 내 세포와 의식이 보다 확장되고 활성화되는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그것이 다행히 내 개인의 삶에서도, 사회에서도, 타자를 받아들이는 데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죠.”
김신록이 연기한 박정자와 진화영은 걸음걸이부터 달랐다. 박정자가 아래를 보면서 다른 사람과 부딪힐까 조심해서 걷는다면, 진화영은 알아서 피해라는 식으로 거칠 것 없이 걷는다.
“사실 인물의 걸음걸이를 특별히 생각하고 연습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의상이나 분장에 영향을 많이 받는 스타일의 배우예요. 사람이 보통 구두 신을 때와 운동화 신을 때, 슬리퍼 신을 때 걸음걸이나 애티튜드(태도)가 자연스럽게 달라지잖아요. ‘예비군 훈련 간다고 군복 다시 꺼내 입으면 자연스럽게 짝다리 짚게 된다’는 말을 듣고 웃었던 적도 있고요. 진화영, 박정자, 오지화의 걸음걸이 역시 제 몸에 걸쳤던 의상과 얼굴에 칠했던 분장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예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기 위해 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조정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여러 면에서 내가 아는 방식을 준비하고 고수하기보다는 촬영 환경 자체가 저를 변화시키고 제게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열어두려고 해요. 카메라가 내 얼굴만 비춘다는 건 누군가 내 얼굴만 들여다본다는 건데, 그럴 때 누구나 좀 달라지지 않겠어요? 다만 카메라를 무섭고 어렵게 여기기보다는 기분 좋은 상대처럼 느끼려고 해요. 지금 제가 하는 건 그 정도의, 환경의 영향에 민감해지는 방식 정도인 것 같아요.”
출연 작품이 만화가 원작인 경우가 많은데(<무빙> <지옥> <스위트홈>) 연기가 조금 더 쉬운가.“저 같은 경우는 시각화된 그림이 있으면 작품 톤이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되는 것 같아요.”
대학원 동기, 절친, 인터뷰로 가까워진 사람 등 <배우와 배우가>에 등장하는 인터뷰이와의 인연은 여럿이지만 공통적으로 ‘연기’가 삶이 된 사람들이다. 황혜란의 인식의 미분, 양종욱의 에너지를 관념화한 ‘사츠’, 김석주의 의지를 뒤집는 세계, 김석영의 끊임없는 트레이닝, 김은한의 계속하기 등등 배우들은 연기를 분 단위로 쪼개 동작 전과 후를 연결해서 보고 생각과 생각 사이를 유영한다.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보고 의견을 나누면서 철학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를 끌어내는, 오랫동안 강단에서 후학을 길러내며, 명강사로도 소문났던 김신록의 내공이 여러 면에 빛을 발한다. 그는 ‘연기 이론서이자 실천서’를 노렸다고 한다.
“대화 상대를 선정하는 데는 그 배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중요했지만, 사실 내가 요새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더 중요했어요. 일방적인 인터뷰가 아니고 ‘대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연기에 대한 생각이나 갈증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기만의 화두와 방법론을 가진 배우들을 찾아가 만난 셈이죠.”
‘배우’로서의 고민은 글과 말의 경계까지도 지우는 것일까. 글이지만 배우스럽다. 독자에게 자기 주변을 돌아보라, 무엇을 생각해보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각 편의 글이 시작된다. 각 챕터(Act) 앞부분(Scene 1) ‘배우와’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이얼로그(대화)라면, 뒤(Scene 2) ‘배우가’는 모놀로그(독백) 식으로 구성됐다. 놀랍게도 글로도 어려운 이론이 입말로 오가고 어떤 글은 입말이 그대로 글로 기록됐다.
“사실 첫 번째 인터뷰 프로젝트는 작정하고 연기 이야기만, 그것도 아주 전문적으로 나누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사전 인터뷰를 해 인터뷰이의 연기적인 화두를 묻고, 본 인터뷰에서 해당 화두에 대해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고, 필요한 경우 추가 인터뷰도 하고, 초고를 작성해서 인터뷰이에게 보내 해당 배우가 수정이나 삭제, 추가를 원하는 부분을 표시해서 돌려보내면, 제가 그것을 다시 손봐서 글을 완성했어요. 그러니 정련될 수밖에 없겠죠. 인터뷰마다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연기론을 쓰는 것 같았어요.”
배우 연기를 보는 일은 많지만 우리는 배우의 연기를 보지 않았다. “시청자로서 혹은 관객으로서 연기를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연기는 작품에 녹아들어서 작품 자체를 재밌게 즐길 수 있다면 가장 좋겠죠. 다만 가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나 순간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때 마스크나 발성, 몸매 그 이상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좋겠죠. 책을 통해 여러 배우의 연기에 대한 사유를 들려드리려던 이유도 연기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에게 연기에 대한 더 다양한 시도와 시각이 열리기를, 잘했다 못했다를 넘어 더 풍부한 언어와 감상이 가능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연기와 세계에 대한 생각이 급전환됐다고 했다.“기존에 내가 가졌던 세상에 대한 이해가 한순간에 모두 낡아버린 것처럼 느꼈어요. 당시에 극장이 문을 닫고 공연이 취소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속된 말로 공연이 ‘엎어졌다’고 하는데요, 말 그대로 저도 엎어졌던 것 같아요. 계속 이어질 것 같던 계단이 툭 끊어져서 불식간에 허공을 디디고 균형을 잃은 것처럼 황당하고 아찔했어요. 믿었던 세계가 우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당황하고 절망했어요. 그래서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지내나 무슨 생각을 하나 만나보고 싶었죠. 혼란 속에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해가는 배우들을 만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어요. <배우와 배우가>는 시간차를 둔 두 번의 인터뷰를 통해 배우 각자의 변화한 생각을 들어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 같아요. 이상하게 그게 위안이 돼요. 그 계속됨이, 그 변화가.”
읽다보면 ‘실천 편’으로 가보고 싶다. 혜화역 1번 출구(대형 신생 극장이 모여 있는 곳)와 2번 출구의 연극이 나뉘는 때, 연극을 어떻게 고를까.“서울연극센터에서 운영하는 <연극in>이라는 웹진이 있는데 그냥 쓱쓱 둘러보면 아직은 생경할 극장, 공연, 배우 이름 등이 많이 나올 거예요. 그중 꽂히는 정보를 조금만 파보면 (포털) 예매 사이트 메인에 걸리지 않은 좋은 작품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에필로그 다음 이야기’에서 ‘매체’ 배우를 만나 연기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사실 에필로그를 쓸 당시 우연히 윤계상 배우님을 만나 작품과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순간 ‘이 대화가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언젠가 무대 위보다는 카메라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온 배우들을 만나 연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기약은 없어요. <배우와 배우가>도 ‘배우들을 만나 창작으로서의 연기, 창작자로서의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마음먹은 때로부터 꼬박 4년이 지나서야 한 권의 책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니까요. 사실 에필로그를 읽은 여러 곳에서 연재 청탁이 오는데, 아직은 적극적으로 추진해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이 지면을 빌려 밝힙니다. 하하.”
김신록은 요즘 여러 편을 동시에 촬영 중이다. 이렇게 바쁜 그가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요새도 가끔 연극 섭외가 들어오는데 마음에 드는 작품을 기다리고 있고 그런 작품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일정을 조율해볼 거예요.”
책의 신2에 해당하는 ‘배우가’ 식으로 근황을 전해달라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어제 JTBC 드라마 <괴물>을 함께 찍은 신하균 선배와 최대훈 배우를 만나 오랜만에 식사도 하고 <배우와 배우가> 책도 선물했어요. 요새 책을 핑계 삼아 오랜만에 함께 작업한 배우들에게 연락해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큰 기쁨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읽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책을 핑계로 그리운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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