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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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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글만이 가슴에 남는다

통념과 전형성을 깨는 반전의 힘…전복적 사유가 인간의 본성에 닿는 울림이 커
등록 2023-01-27 14:38 수정 2023-01-28 07:26
뱅크시의 그림 <첫 번째 선언>. 독일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립스틱을 바른 전쟁 포로와 유대인.

뱅크시의 그림 <첫 번째 선언>. 독일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립스틱을 바른 전쟁 포로와 유대인.

1945년 연합군은 전쟁 포로와 유대인을 가둬둔 독일의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를 해방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들에게 어떤 구호품을 보내겠습니까? 먹고 입을 게 절실했을 테니, 빵이나 담요를 보냈겠죠.

얼마 지나지 않아 구호품이 도착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엄청난 양의 립스틱이었습니다. 어느 영국군 장교는 일기장에 ‘천재적인 발상’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굶주림에 몸을 못 가누면서도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수감자들은 더 이상 팔에 문신을 새긴 숫자에 불과하지 않고 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거죠. 립스틱이 이들에게 다시 인간성을 되돌려줬다는 겁니다. 인간다움은 당장의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나 봅니다.

이 예상 밖의 사건은 우리가 글을 쓸 때 가져야 할 핵심 목표인 ‘반전’(反轉)에 대해 알려줍니다.

우리가 아는 도덕이나 상식은 허위입니다. 반발심이 생기더라도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면 일단 거기서 출발하는 게 좋습니다. 진실은 도덕이나 상식과 거리가 멀고, 가끔은 도덕과 상식을 배신하기조차 합니다(배고픈 자에게 립스틱이라니!).

도덕과 비도덕, 윤리와 비윤리는 뒤엉켜 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요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요양원이 강원도 고향에 있어서 위독하다는 연락이 오면 며칠 곁에 있다가 좀 괜찮아지시면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무렵, 외국에 1년 체류할 계획이 잡혀 있었습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출국하기 전에 돌아가셨으면’ 하는 못된 마음이 들었습니다. 출국한 다음에 돌아가시면 비싼 비행기표를 다시 사서 왔다 가야 하니 손실이 컸죠. ‘다행히’ 어머니는 출국 한 달 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저는 얼마나 부도덕한 자식입니까. 돌아가실 때 어머니를 품에 안고 흘렸던 눈물과 식어가는 어머니의 뺨을 어루만지는 제 손길은 진짜였을까요. 비행기 요금을 계산하는 마음이 진짜였을까요.

여러분을 공범으로 끌어들여 말하자면, 우리 마음은 늘 이렇습니다. 어떤 일이든 도덕과 비도덕, 윤리와 비윤리가 동시에 뒤엉켜 있죠.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듯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자기 눈앞에 보이는 한 줌의 이익에 골몰하죠. 어머니의 마지막 장면을 글로 쓴다면 제 잇속만 챙기는 저 모습을 썼을 겁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쓴다면 말입니다(이미 썼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네요).

더 창피해지기 전에, 글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요? 자기소개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엄하면서도 자상하신 분’이신가요? 일단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해보는 겁니다. 다음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글을 읽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착하다.’‘우리 아버지는 사기꾼이다.’

‘우리 아버지는 사기꾼이다’라는 문장에 눈길이 가죠. 아버지를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파격과 진솔함 때문이겠지요. ‘도덕’의 눈으로 봤을 때,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봐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하는 아버지를 사기꾼이라고 하면, 궁금해지죠. 실제로 직업이 사기꾼일 수도 있고, 가족을 장난스럽게 골려 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일 수도 있겠죠. 여하튼 ‘사기꾼’이라는 말 속에 남다른 진실이 담겨 있을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사람이 참 못됐죠).

기존 가치를 뒤집는 확신을 연기하라

우리는 이미 ‘아버지’에 대한 전형적인 상(像)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라면 갖춰야 할 상투적 덕목이나 기대치가 있죠. 그런 이미지는 기성품입니다.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걸 그대로 따라 할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에 대한 글은 내용이 빤합니다. 가난했지만 성실하게 일해 성공했다거나,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거나, 바쁘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거나 하는 얘기 말입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 만하면 살 만한 대로 고군분투하는 우리들의 아.버.지! 글의 마무리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정도가 됩니다. 글을 망치는 지름길이 예측 가능한 글을 쓰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글은 어떤가요?

‘나는 그를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다.’

어느 글쓰기 강연 때였습니다. 20분을 주고 ‘그’라는 소재로 글을 써보라 했습니다. 시간이 다 지날 무렵 서른 살 청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저 한 문장을 써내려갔습니다. 저 한 문장만으로도 완벽한 글이 됐습니다.

왜냐고요? 강력한 반전이 있으니까요. 미처 말하지 않은 빈 공간은 독자의 상상으로 채울 테니까요. ‘저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했습니다. 반전의 크기에 차이가 있겠지만, 모든 글은 반전을 노려야 합니다. 반전이 없는 글은… 쓰지 않는 게 낫습니다.

반전은 다짜고짜 막무가내로 반대하고 뒤집는 게 아닙니다. 반전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통념을 뒤집고 관습을 혁파합니다. 기존의 가치와 관점을 뒤바꾸는 겁니다. 확신을 연기하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판단을 연기하는 겁니다. 움직일 수 없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당장 벌어지는 일을 가감없이 긍정하라

반전은 원래 어딘가에 이미 있는 게 아닙니다. 결행하는 데서 비로소 태어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반전은 원래 있다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없던 걸 ‘결행’하는 그 순간, 오직 그 순간에만 생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여기서 ‘없던 것’이란 진짜로 없던 게 아닙니다. 어둠 속에 숨어 있어서 안 보일 뿐입니다. 그걸 글로 쓰는 순간 있던 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였다’라는 엉뚱한 말을 꺼내는 순간, 평소에 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모성)가 나타납니다. 글이 갖는 오묘한 힘입니다.

이런 반전을 가로막는 게 도덕과 상식입니다. 도덕과 상식은 과거로부터 온 명령입니다. ‘이럴 땐 이래야 한다’고 미리 정해져 있으니까요.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만사를 제쳐두고 슬퍼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한다.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 공중도덕도 마찬가지입니다. ‘버스 탈 때는 줄을 서야 한다. 거리에 침을 뱉지 말라. 젊은이는 노약자석엔 앉지 말라. 우측 보행!’ 어기면 비난받으니, 다른 생각이 생기면 화들짝 놀라 꾹꾹 내리눌러야 합니다. 생겼는데도 안 생긴 것처럼.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도덕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잊어버리게, 잃어버리게, 놓치게 합니다. 이 자리에 없는 것을 찾게 합니다. 반전은 지금 당장 벌어지는 사건이나 떠오른 생각을 가감 없이 긍정하는 데서 생깁니다.

게다가 반전의 묘미는 기존의 강력한 논리를 약한 논리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좋은 글은 힘이 강한 관점을 뒤엎고 약한 관점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던 생각에 의심을 초대하는 일입니다. 전복적 사유. 소수자 되기.

예를 들어보죠.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자고 할 때 ‘주인의식을 갖지 말자’고 말하는 겁니다. 주인의식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쏟았던 땀과 노력에 대한 반대급부나 권리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계의 주인은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겸손함이 환대의 공간을 만듭니다. ‘노조가 부패했다’는 대통령의 말에 기막혀서 ‘노조는 부패한 게 아니라 부족하다’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부패’와 ‘부족’은 ‘부’로 시작한다는 것 빼고는 아무런 연결 지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노조가 부패했다’는 강한 논리를 반박하고 ‘노조가 부족하다’는 약한 논리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뻔한 진리보다 개연성을 믿어라

반전을 모색하려면 진리(참/거짓)보다는 개연성에 기대는 게 좋습니다. 개연성에 기대는 것은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너그럽게 허용하는 자세입니다. 예측 가능함을 어길 때 반전이 만들어집니다. 맞는 말, 똑 떨어지는 말, 진리를 담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말을 하려고 합니다. 힘의 강약이 뒤바뀐 말을 하려고 합니다.

기존의 상식에 반하는 발견, 도덕을 거역하는 글이 좋은 글입니다. ‘나쁜 시만이 가슴에 남는다’고 한 김수영의 말처럼 ‘나쁜 글만이 가슴에 남습니다’. 나쁜 글을 쓰려면 글감에 들러붙어 있는 도덕과 상식이라는 나태한 먼지를 털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독자의 허를 찌르지?’ 반전, 글쓰기의 핵심입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독자 글>
지난번 글감은 ‘오래된 물건’이었습니다. 연초라 바쁠 텐데 아홉 분이 글을 보내주셨네요. 네 분은 계속 보내주셨고요(도희, 숙연, 정선, 혜욱님은 개근입니다). 글감으론 토스터기(도희님), 머리핀(정미님), 양은냄비(숙자님), 곰인형(유진님), 소반(숙연님), 탯줄(혜욱님), 쌀통(은광님), 가족(지은님), 편지(정선님)를 다루었네요(정선님은 ‘전자레인지, 원두분쇄기, 실크원피스, 편지’ 등 여러 물건을 쓰셨는데, 글 하나에는 하나의 글감이면 충분합니다). 겹치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역시 우리 삶은 다채롭습니다.
그 오랜 세월, 버리지 않고 곁에 둔 물건이니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물건에 묻어 있는 사람의 흔적과 기억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죠. 물건은 내 삶의 여정과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징검다리입니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 보면, 사연을 듣기에 앞서 징검다리 자체가 궁금합니다. 징검다리를 조금 천천히 밟고 넘어가면 어떨까 싶네요. 물건을 단지 어떤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도구로만 보지 말고, 물건을 주인공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어떻게 생겼지? 어떤 소리가 나지? 어떤 냄새가 날까? 감촉은 어떻고? 이 부분을 소홀히 다루면 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간극이 생깁니다. 글 쓰는 나는 보아서 잘 아는데, 읽는 사람은 보지 않아서 상상이 잘 안 되는 상황. 그냥 물건 이름을 적는다고 독자도 같은 물건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독자도 당신이 갖고 있는 물건을 비슷하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게 글쓰기의 어려운 과제 중 하나입니다. 이 간극을 묘사로 메꿔야 합니다(묘사에 대해선 다음 시간에).
예를 들어, 혜욱님은 아이의 탯줄을 꺼내 보면서 사춘기 딸과의 갈등을 다독인다고 했는데, 탯줄에 대해서는 ‘우울감이 생기면 탯줄을 꺼내 본다’ ‘아이의 탯줄을 보며 반성에 들어갔다’ ‘탯줄은 초심을 일깨워준다’고만 언급하고 있어요. 독자는 탯줄 자체가 궁금해요. 어떤 모양인지, 굵기는, 색깔은, 감촉은? 어디에 담겨 있지? 이런 얘기를 덧붙이면 좋겠더군요.
은광님은 오래된 쌀통을 보여주려고 애썼습니다. ‘키 120센티, 가슴둘레 100센티. 베이지색 탄탄한 철통 몸매를 자랑하며 갈색 머리상판을 이고 싱크대 옆을 딱 버티고 서 있다.’ ‘두 개의 작은 서랍을 달고 이쑤시개, 라이터, 병따개 등 생활에 요긴한 물건을 척척 내어준다.’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쌀알과 함께 와르르 쏟아져서 울면서 밥을 했다.’ ‘아이들이 붙였던 스티커와 쿠폰이 빽빽하던 자리는 검게 흉터처럼 남았고, 여기저기 긁힌 상처들, 상판의 갈색 필름지도 벗겨지기 시작했다. 쌀알을 받아내는 통은 금이 갔고 버튼은 간혹 눌러지지 않았다.’ 물건 자체에 시선을 두고 요리조리 따져볼수록 물건에 얽힌 이야기도 더 풍성하게 나옵니다. 그러다보면 쌀통에서 ‘아이가 사준 반지가 또르르 튀어나올’ 수도 있는 것이죠.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누군가를 만납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던 장면이 떠오르나요? 사진을 찍듯이 그 순간을 포착하는 글을 써서 보내주세요.
주제: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분량: 1천 자 정도
마감: 2023년 2월15일(수)
보낼 곳: han21@hani.co.kr

*무적의 글쓰기: 2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해온 김진해 교수가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은’ 무적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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