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콤달콤, 풍성한 가을, 뉴턴의 사과, 애플스토어까지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를 보며 떠올릴 말은 수없이 많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추상을 만나면 구체를 생각하고, 구체를 만나면 추상을 생각하라.’
글을 쓸 때 갖춰야 할 마음의 습관으로 무엇보다 추상과 구체를 번갈아 생각하는 연습을 하라 권하고 싶습니다.
‘사과’로 시작해볼까요. 글을 쓰기 위해 ‘사과’(구체)를 봤다면 사과라는 구체에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사과의 모양, 맛, 색깔 같은 걸 생각하면 계속 구체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체에서 추상을 찾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진부한 의미만 떠올리기 쉽죠. ‘사랑’이나 ‘금단의 열매’(성경)와 같이 사회적으로 굳어버린 의미 말입니다. 사과를 진공이나 무중력 상태에 놓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과만 쳐다보면서 ‘사과, 사과, 사과’를 되뇌다보면, 그 말에 끌려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를 외치게 됩니다.
말에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말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말은 사물의 차이를 감춥니다. 겉은 빨갛데 속은 하얗고 아삭아삭한 질감에 새콤달콤한 맛을 내는 동그란 과일이 있습니다. 이들 각각은 고유한 색깔과 모양과 맛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과’라는 말은 이들 각각이 가진 고유성을 무시하고 마치 하나의 단일한 사물인 거로 생각하게 합니다. 같은 상자에서 꺼낸 사과인데도 맛과 모양이 다릅니다. 어떤 건 짱짱한데 어떤 건 푸석푸석하죠. 차이를 무시한 채 마치 동일한 것처럼 등치시킵니다. 차이를 감추는 말의 본성을 안다면, 우리가 쓰는 글은 더 세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구체’는 ‘사과’만 바라보는, 그런 구체가 아닙니다.
추상은 구체에서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사과’라는 말(명사) 하나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됩니다. 거미줄처럼 생각을 확장해야 합니다. 구체를 남다르게 관찰해야 합니다. ‘남다르다’는 ‘기발하게’라는 뜻보다는 ‘끈기 있게’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사과로 할 수 있는 행동을 끈기 있게 떠올려보세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기, 입을 앙다물고 오물오물 먹기, 입을 벌려 우걱우걱 먹기, 먹다가 그냥 접시째 상에 놔두기, 껍질이 끊어지지 않게 한 줄로 깎기, 그러다 중간에 끊어져 툭 떨구기, 포크에 찍어 앞에 있는 사람 입에 넣어주기, 씨를 씹어 퉤퉤 뱉기. 이렇게 행동을 떠올린다는 건 사과에 얽힌 ‘사건’이나 ‘사람’을 떠올린다는 뜻이 됩니다.
사과는 동그랗기만 하지 않죠. 사과 꼭지도 튀어나와 있고, 반대편엔 꽃받침과 꽃수술의 흔적으로 움푹 패어 있습니다. 반으로 잘랐을 때 사과씨를 중심으로 심장처럼 생긴 경계선도 있고요. 사과가 어디에 들어 있는지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과상자, 보자기, 외투 주머니, 반찬통에도 들어 있고 샌드위치, 샐러드, 잼, 주스에도 들어가죠. 사과와 연결된 것을 최대한 펼쳐놓아야 거미줄에 나방이 걸리듯 고유한 이야기와 의미(추상)가 튀어나옵니다.
‘일상에서 말의 주인이 되어 삶의 철학을 탐구하자’는 차원에서 ‘짝퉁 철학자 되기’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에겐 어떤 문장이 있는가? 당신에게 쌓여 있는 문장이 곧 당신이다”라는 말을 했는데요, 실은 작은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추석에 ‘집은 사람이 기둥인데, 사람이 없으니…’ 하며 흘리듯이 던진 말이 글감이 되어 쓴 것입니다. 제 글이 만들어진 과정은 이런 식입니다. ‘작은할머니의 말(구체) → 삶의 철학은 말을 색다르게 보는 데서 시작함(추상) → 다른 예 찾기(구체) → 당신에게 쌓여 있는 문장이 곧 당신이다(추상)’ 그런데 실제 쓴 글은 마지막에 있는 ‘당신에게 쌓여 있는 문장이 당신이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문장을 배치하는 건 다른 차원이죠. 여하튼 우리 머릿속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자유롭게 넘나들어야 글이 깊어지더군요. 핵심은 구체를 홀로 놓아두지 말고, 구체와 연결된 행동과 사건, 또는 다른 사물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서 열린 경북 영주 사과 홍보 행사에서 시민들이 사과 빨리 먹기 시합을 즐기고 있다. 연합뉴스](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70/681/imgdb/original/2022/1129/6816697055499252.jpg)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서 열린 경북 영주 사과 홍보 행사에서 시민들이 사과 빨리 먹기 시합을 즐기고 있다. 연합뉴스
그럼, 추상에서 구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 ‘사랑’ ‘정의’ ‘평화’라는 말은 추상적입니다. 이런 걸 글감으로 삼아 ‘산다는 건 말이지, 어쩌고저쩌고’ 하다보면 글을 망치기 십상입니다. 추상을 만나면 그것을 담는 구체가 무엇이 있는지를 탐색해야 합니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면서 추상적으로 정의하려 하지 말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구체적 사건이나 사물, 사람을 떠올려야 합니다.
제가 학생과 반말 쓰는 선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말 쓰기도 ‘추상에서 구체로’라는 방식을 밟았습니다. ‘언어라는 거대한 장치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추상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걸 추상적으로만 얘기했습니다. “어떤 언어든 ‘반드시’ 표시해야 하는 게 있다. 프랑스어는 모든 명사에 남성, 여성 중 하나를 반드시 표시해야 한다. 독일어는 중성까지 있다. 한국어에는 ‘경어법’이 그렇다. 존댓말과 반말 중의 하나를 안 쓰면 말을 맺을 수 없다. 반드시 표시해야 할 것이 우리를 강제한다”는 식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감명받을 줄 알았습니다. 웬걸요, 감명은커녕 시큰둥하게 흘려듣거나 꾸벅꾸벅 졸기만 하더군요. 안 되겠다 싶었죠. 말의 질서가 갖는 힘을 직접 체험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걸 ‘평어 쓰기’라는 ‘구체’에서 찾았습니다. 추상을 말하려고 구체의 숲을 뒤적거린 거죠.
그렇다고 추상과 구체를 엄격히 나누라는 게 아닙니다. 추상과 구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둘을 쉽게 분리합니다. 추상은 뭔가 고매한 고담준론 같고, 구체는 시시껄렁한 일상이라 여기죠. 일상에서 추상의 실마리를 끄집어내야 합니다. 추상적인 얘기를 하고 싶으면, 추상이 실현된 구체적인 현실(일상)로 내려와야 합니다.
지난 칼럼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분했을 때’라는 주제로 글을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독자 여러분이 보내주신 글이 고맙게도 16편이나 됐습니다. 하나같이 분하고 억울한 일을 겪으셨더군요.
어머니가 암에 걸렸는데도 출근해서 일하라는 상사(설희님), 같이 일하는데 한 번도 식사 자리에 끼워주지 않는 젊은 직원들(영희님), 유학 중에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동생(도희님), 괴롭히는 직장 상사 및 이혼 과정(은주님), 못생겨 미스코리아에 못 나간다고 놀린 사촌언니(혜윤님), 나쁜 기억을 쉽게 까먹는 자신(혜욱님),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한 남자(현민님), 거짓 소문을 퍼뜨린 동아리 친구(희주님), 권력자에게 맞서지 못한 자신(yan님), 외국 여행 중에 도움을 주는 척하며 가스라이팅한 공항 직원(Ree님), 반장도 아닌데 나오라고 해서 때린 체육 선생님(상헌님), 우리말 바로쓰기에서 1등 했는데 친구들 안 도와줬다고 혼낸 선생님(정선님), ‘쇠고기’라 쓰는 이유를 설명했더니 놀린 국어 선생님(무빈님), 밖에서 신망을 얻지만 가정에선 불만스러운 남편(혜경님), 정반대 주소지로 발령 낸 교육청(숙연님), 휴대전화 잃어버려 전화했는데 이름 안 밝혔다고 혼낸 선생님(유진님).
이번에는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대부분의 글이 시작해야 할 때 시작하지 못하더군요. 예를 들어보죠.
한참을 고민했어요. 잘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평탄한 인생도 아니었어요. (…) 그렇다고 이 큼직한 일들이 저에게 살면서 ‘가장’ 분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 다시 고민해보았습니다. ‘분하다’는 것은 뭘까? 사전에 검색해보니…(yan님)
내가 겪은 일은 다른 사람이 안다면 ‘뭐 그런 일 갖고!’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작은 의심도 없이 믿다 뒤통수 맞은 것이 분해서 화병이 날 것 같았다.(숙연님)
가장 분했을 때가 언제였나? 딱히 없는 것 같다. 잘 살아온 50 인생인가? 아니다. 내가 분하다, 억울하다고 느꼈던 그 시간이 있었다.(상헌님)
40살이 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분한 감정이 든 순간이 분명 있었겠지만, 나는 굉장히 잘 잊고 털어내고 사는 성격이라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분한 감정의 정의와 내 자신의 인생에서의 고난이나 상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은주님)
글을 시작할 때, 그 글을 쓰게 된 경위나 글감을 택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한 일이 뭐가 있었는지’ 생각만 하면 되지, 그걸 글에 쓰면 안 됩니다. 여러분 머릿속의 고민은 독자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점심 뭐 먹었어?’라고 묻는데, ‘점심 메뉴를 고르려고 이런 고민을 했어’라고 하면 답답해지겠죠? 담백하게 바로 시작하세요.
글쓴이는 연극으로 치면 주인공 배우입니다. 연출도, 조명도, 무대 담당도 아닙니다. 고생하는 스태프가 짠해서 조명 설치하는 일도 도와주고 음향 상태 체크도 해주다보면 연극이 망합니다. 연기에 집중! 써야 할 글감이나 주제가 떠올랐으면 그 얘기만 하세요. 무대 설치하고 배경 설명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시고요. 시작할 때 시작하면 글이 훨씬 힘차고 박동감이 넘칠 겁니다.
참고로, 권정생 선생의 시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2’는 ‘시작할 때 시작하는’ 걸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 학년인 도모꼬가/ 일 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다음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글에서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추상적인 감정을 표현했다면, 이번에는 구체에서 출발해보시죠.
주제 칫솔
분량 1천 자 정도
마감 2022년 12월11일 일요일
보낼 곳 han21@hani.co.kr
*무적의 글쓰기: 2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해온 김진해 교수가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은’ 무적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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