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우리 동네 이야기(<아무튼, 망원동>)가 나왔다기에 읽어봤다. 다음엔 양말이 주제(<아무튼, 양말>)기에 양말로 대체 무슨 이야길 쓸 수 있을까 싶어서 읽었다. 다음부턴 ‘아무튼’ 시리즈가 새로 나올 때마다 주제나 작가와 상관없이 다 구매했다. 모으는 재미가 있다.”
‘아무튼’ 시리즈의 팬인 김승미씨의 말이다. ‘아무튼’은 출판사 3곳(위고·제철소·코난북스)이 함께 만든 에세이 시리즈의 이름이다.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한 가지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들이다. 책은 150쪽 안팎의 가벼운 분량이다. 한 손에 들어가는 작은 사이즈다. 2017년 10월 ‘좋아하는 한 가지’라는 주제로 <아무튼, 망원동> <아무튼, 피트니스> <아무튼, 서재> 등의 첫번째 시리즈 책이 나온 뒤 독자에게 큰 인기를 얻어 최근엔 50번째 책 <아무튼, 할머니>까지 나왔다.
최근 ‘아무튼’ 시리즈처럼 작은 판형, 가벼운 분량의 시리즈 도서가 출판계에 쏟아지고 있다. 이런 책들은 대체로 문고판(10.5×14.8㎝, A6판)이거나 문고판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 100~200쪽 분량(원고지 500장 내외)이다. 삽화나 사진이 아예 없거나 비교적 적은 대신 감각적인 표지 디자인이 눈에 띈다.
과거에도 문고판 시리즈는 많았다. 출판사 입장에선 제작비를 낮춰 판매가격을 낮추려는 경제적 이유가 컸다. 하지만 최근엔 경제적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비치리딩’ 시리즈를 출판하고 있는 인디페이퍼의 최종인 대표는 “독자 수는 줄어들지만 책의 내용이 더 세분되는 추세에 발맞춰, 다품종 소량 생산에 문고판이 적합하다. 독립서점이라는 새로운 서점 트렌드도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이삼’ 시리즈(문학과지성사)를 만든 홍근철 편집자는 “과거에는 원고 분량이 많지 않은 경우 문고판 판형을 고려했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문고판 판형에 맞춰 책을 기획하는 일이 잦다”며 “가볍게 부담 없이 읽을 만한 책뿐만 아니라, 무거운 내용을 다루더라도 문고판 형식으로 접근하는 책 역시 늘어났다”고 말했다.
작은 판형의 시리즈에서 가장 주를 이루는 장르는 에세이다. 하나의 표어 아래 세밀한 취향, 소소한 행복을 다룬다는 특징이 있다. ‘띵’ 시리즈(세미콜론)는 ‘식탁 위에서 만나는 나만의 작은 세상’을 표어로 짜장면, 평양냉면, 치즈 등 저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다룬다. ‘들’ 시리즈(꿈꾸는인생)는 ‘한 사람이 책 한 권 분량을 꽉 채워 말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에세이다. 즐거운 것이나 괴로운 것, 재미있는 법칙, 배워야 할 삶의 태도 등 그 어떤 것도 주제가 될 수 있다. ‘난생처음’ 시리즈(티라미수더북)는 한 번쯤 꼭 해보고 싶은데 선뜻 시도하기 어려운 것을 먼저 경험해보고 푹 빠진 이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난생처음 킥복싱> <난생처음 서핑> 등이 있다. ‘이까짓’ 시리즈(봄름)는 콤플렉스를 특별함으로 승화시킨다. 몸에 털이 많아 콤플렉스인 저자가 쓴 <이까짓, 털>, 세입자 작가가 ‘우리 집’을 찾아다니며 겪은 이야기 <이까짓, 집> 등이 나왔다. ‘디귿’ 시리즈(동녘)는 ‘나로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가는 씩씩한 혼자들의 독립생활을 응원한다’는 콘셉트를 내세운다. 기본소득을 주제로 한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에 이어 등산과 달리기를 주제로 한 책이 나왔다. ‘날마다’ 시리즈(싱긋)는 날마다 하는 생각, 행동, 습관, 일, 다니는 길, 직장 등을 주제로 한다. 30년차 지하철 생활자의 이야기 <날마다, 지하철>을 시작으로 최근엔 10년 동안 북디자이너로 일한 이야기 <날마다, 북디자인>이 나왔다.
직업에 관한 작은 판형의 시리즈도 다채롭다. ‘일하는 마음’ 시리즈(제철소)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 그들의 노동에 대해 인터뷰한 책이다. <출판하는 마음> <문학하는 마음> 등이 출간됐는데 인터뷰 내용을 질의응답(Q&A)이 아닌 에세이 형식으로 담았다. ‘일이 삶이 되는, 일이삼’ 시리즈(문학과지성사)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를 담은 에세이다. 최근 <게임 기획자의 일>이 나왔다. ‘땅콩문고’ 시리즈(유유)도 <열 문장 쓰는 법> <책 파는 법> <에세이 만드는 법> 등 각종 ‘하는 법’을 알려주는 직업 에세이다.
에세이가 유독 작은 판형으로 나오는 이유는 뭘까. 휴대성과 가벼움 덕분이다. ‘아무튼’ 시리즈를 만든 김태형 제철소 대표는 “에세이는 다른 분야보다 읽는 공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기에 휴대하기 쉽도록 작고 가볍게 만들고 싶었다”며 “외출할 때 부담 없이 들고 나갈 수 있도록 손가방이나 코트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면 좋겠다고 생각해 문고판에 가까운 작은 판형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에세이만 작고 가벼워진 것이 아니다. 인문학 서적도 마찬가지다. 민음사는 2022년 6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성과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탐구’ 시리즈를 출간했다. 기존 인문학 서적과 달리 한 손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판형에 빨간색 표지를 선택했다. 전국의 출판사 5곳(온다프레스·포도밭출판사·이유출판·열매하나·남해의봄날)이 공동출간한 인문서 ‘어딘가에는 ○가 있다’ 시리즈도 ‘서울이 아닌, 대도시가 아닌 어딘가에서 묵묵하고 단단하게 자기 삶과 주변을 일구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역시나 작고 가볍다. 민음사 ‘탐구’ 시리즈의 신새벽 편집자는 “독자는 어디서든 들고 읽을 수 있게 작고 가벼운 책을 좋아한다”며 “스마트폰으로 대부분의 뉴스·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종이책을 읽는 드문 시간에는 반드시 읽어야 할 내용만 보도록 짧은 분량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어딘가에는 ○가 있다’ 시리즈를 공동출간한 남해의봄날 정은영 대표는 “독자와의 친밀함을 높이고, 인문학이라는 어려운 주제도 쉽고 가볍게 느낄 수 있도록 작은 판형, 가벼운 분량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문학도 문고판 시리즈에 합류했다. ‘쏜살문고’ 시리즈(민음사)는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중심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나 에세이를 중심으로 문고판을 내놨다. ‘안전가옥-쇼트’ 시리즈(안전가옥)는 장르문학 창작자를 지원하는 커뮤니티 안전가옥에서 발간하는 단편 선집이다. ‘핀 시리즈’ 시리즈(현대문학)는 당대 한국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해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했다. 유상훈 편집자(민음사)는 쏜살문고의 기획 의도에 대해 “좀더 접근 가능한 가격으로 지구력 있게 시리즈를 선뵈려면 민음사의 고전들을 다시 편집하고, 큐레이션해서 오늘날 독자들의 요구에 맞게 펴내는 편이 역시 옳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제작 기간이 짧은 만큼 발 빠르게 트렌드를 담는 장점도 있다. 현실과 밀착한 지식과 정보를 담은 ‘북저널리즘’ 시리즈를 만든 이연대 대표(스리체어스)는 “일반적으로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이 걸리는데, 에세이는 상관없겠지만 지금의 현상을 분석하고 가까운 미래를 전망하는 책이라면 1년은 너무 늦기에 제작 과정을 3개월로 단축했다”며 “독자로선 더 빨리 최신 이슈를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새벽(민음사) 편집자는 “작고 가벼운 책을 좋아하는 것은 스마트폰 세대가 유튜브, 틱톡 등 영상 플랫폼에서 ‘숏폼’을 선호하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김승미씨처럼 시리즈에 대한 신뢰가 쌓여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 역시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 유상훈(민음사) 편집자는 “일단 시리즈를 이루면 그 특색이 생겨나면서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기 쉽다”고 말했다. 홍근철(문학과지성사) 편집자도 “시리즈는 여러 책을 한데 묶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책의 성격을 더 선명하게 나타내고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godjimin@hani.co.kr한 시리즈 여러 출판사
“바닷가에서, 혹은 여행지에 가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책은 없을까?”
스릴러, 호러, 공상과학(SF)을 묶은 장르단편집부터 에세이, 그림책, 소설, 인문, 취미, 시 그리고 웹툰까지 다양한 장르를 망라한 ‘비치리딩’ 시리즈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같은 시리즈지만 출판사가 각각 다르다. 8권의 책에 출판사 7곳 이름이 각각 쓰여 있다.
최근엔 지역 출판사의 공동출간도 눈에 띈다. 부산의 출판사 7곳(인디페이퍼·미디어줌·목엽정·베리테·예린원·냥이의야옹·호밀밭)은 ‘여행지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시리즈’라는 콘셉트로 8권의 책을 냈다. 전국의 출판사 5곳(온다프레스·포도밭출판·이유출판·열매하나·남해의봄날)도 ‘어딘가에는 ○가 있다’는 시리즈를 냈다. 충무김밥의 원조를 찾아 나선 <어딘가에는 원조 충무김밥이 있다>(남해의봄날), 충북 옥천 이주여성들이 들려주는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포도밭출판) 등 5권의 책이다.
‘비치리딩’ ‘어딘가에는 ○가 있다’ 두 시리즈 모두 작고 가볍다. 시리즈를 만들 때 공동출간은 어떤 장점이 있을까. 최종인 인디페이퍼 대표는 “시리즈는 혼자 만들기도 쉽지 않고, 설사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을 알리기 쉽지 않은데 같이 만들면 혼자 하는 것보다 빠르게 시리즈를 만들 수 있고, 다양한 마케팅을 함께 할 수 있으므로 브랜드파워를 높일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울과 수도권의 이야기가 아닌 지역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데서도 의미가 있다. 정은영 남해의봄날 대표는 “각 지역에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만들어내는 데 그 지역 출판사만큼 잘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며 “각 지역에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발굴하고 싶었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 지역만이 아닌 전국의 출판사와 함께 했다”고 말했다. 최종인 대표는 “부산 출판사들이 부산 배경의 이야기나 부산 작가들의 글과 그림을 ‘부산스러운 장르’(다양한 장르)로 소화했다”고 평가했다.
‘비치리딩’ ‘어딘가에는 ○가 있다’ 시리즈의 공동출간은 앞으로도 이어질 계획이다. ‘비치리딩’ 시리즈는 시즌2를 준비하고, ‘어딘가에는 ○가 있다’ 시리즈는 1년에 각 출판사에서 1권씩 책을 내서 총 5권씩 내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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