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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는 당위 아닌 선택할 권리

장애를 제거 대상으로 보는 폭력성 고발한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등록 2022-06-14 12:54 수정 2022-06-15 01:36

한자어 ‘병신’(病身)은 문자로만 보면 ‘병든 몸’이란 뜻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병신은 특정 질병을 앓는 환자가 아니라 장애나 불구를 지닌 몸의 멸칭이나 다른 사람을 낮잡아보는 욕설로 쓰인다. 장애를 가진 몸을 가리키는 낱말은 왜 이렇게 오염됐을까? 질병과 장애는 소속집단의 거부와 모욕을 넘어 강압적 수단으로라도 치유돼야 하는 ‘비정상’ 상태인가?

미국 시러큐스대학에서 여성·젠더학과 장애학을 연구하는 김은정 교수는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강진경·강진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신체 주권을 둘러싼 민감한 문제를 직시한다. 박사학위 논문에 후속 논문과 연구를 보태 2017년 영문으로 출간한 원저 가 우리말 번역본으로 나왔다.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젠더·성의 재활과 정치’라는 부제가 책의 주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지은이는 ‘치유 폭력’을 “타자를 나아지게 해줄 것이란 명목으로 타자가 지닌 차이를 지우려는 힘의 행사”라고 정의한다. “사회가 질병과 장애의 존재 자체를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치유 과정에서 그 대상을 파괴할 때” 치유 폭력이 일어난다. 국가가 “구성원의 근대적 표준과 수월성에 맞춘 통치 구조와 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치유 폭력은 정당화”됐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공적인 장에 참여하는 것을 “사회로 나온다”고 표현하는 것은 재활과 치유의 공간이 사회 ‘밖’에 있다는 방증이다. 이때 사회 안과 밖은 이른바 ‘정상성’과 ‘규범적인 몸’을 기준으로 구획된다. 치유는 그렇게 의학적 진단, 도덕적 당위를 넘어 정치적 행위의 대상이 된다. 이런 분석은 미셸 푸코, 조르조 아감벤 등이 천착했던 ‘생명정치’ 개념과도 맥락이 닿는다. 생명정치란 인간의 생명과 그 현상, 나아가 생명체인 인간의 몸과 실존적 삶의 방식을 규율하는 정치적·사회적 권력관계를 가리킨다.

지은이는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를 다룬 소설, 영화, 신문 기사, 다큐멘터리 등을 텍스트 삼아 가족과 국가가 ‘치유’에 개입하는 과정의 폭력을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분석한다. 여성은 장애뿐 아니라 젠더의 굴레에서 이중으로 소외된다. <심청전>에서 심청이 아버지의 개안을 위해 인신공양을 선택한 것은 장애를 반드시 치유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여성의 희생을 미덕으로 묘사한 ‘대리 치유’ 서사다. 소설 <백치 아다다>(1935), 영화 <꽃잎>(1996), 단편영화 <아빠>(2004), 다큐 <핑크 팰리스>(2005) 같은 작품에서도 장애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비장애·이성애·성기 중심의 협애한 강박을 보인다. 지은이는 의료서비스의 경제적·물리적 접근성 개선뿐 아니라 “치유를 당위가 아닌 선택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 병이 완치되지 않아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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