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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사랑으로 읽고, 정확하게 쓰기 [21WRITERS②]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쓴 신형철 작가 인터뷰
등록 2022-03-22 16:05 수정 2022-03-28 18:29
사진=김진수 선임기자

사진=김진수 선임기자



*신형철, 정확한 문장으로 대상을 생포하기 [21WRITERS①]에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52.html

묘사보단 생포에 가까운

신형철은 글짓기를 집짓기에 비유한다. 이 공정의 준칙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흡사 ‘인식의 대목장’ 같은 그의 장인적 태도가 드러난다. 첫째, “취향이나 입장이 아닌” 인식을 생산해낼 것. 둘째,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셋째,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해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비평은 그 어떤 글짓기보다 정교한 언어의 집을 짓는 일일 텐데요. 많이 읽고 쓰는 일 외에, 선생님이 비평가로서 반복적으로 훈련한 일도 있을까요?

“비평가로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중 하나는 시를, 그것도 젊은 시인들의 시를 포기하지 않는 연습이에요. 자주 받는 질문이 있어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어려워서 모르겠다, 왜 이런 것이냐. 그런데 시는 원래 어렵고 젊은 시인들의 시는 언제나 어려워요. ‘젊은 시인들’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나이의 독자에게는요. 그러나 또래들끼리는 공감하며 읽잖아요. 이때 내가 포기하면 복수심이 생겨서 대상을 비난하고 싶어져요. 저도 나이가 들수록 그런 유혹을 느낄 때가 많고요. 내가 즐길 수 없더라도 그게 대상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반복해서 되새기지 않으면 잊고 말아요.”

-아무래도 학생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2014년 조선대에 부임한 뒤엔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보통 어느 정도로 글을 쓰나요?

“2021년의 경우 논문 1편, 평론 1편, 한 달에 하나씩 쓴 칼럼 12개, 그 밖에 몇 개의 추천사들. 이 정도예요. 한심한 수준이죠. 그렇다고 어디 불평할 곳도 없어요. 학교 일을 소홀히 할 수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더 줄일 수도 없으니까요.”

-작가들에겐 고유의 루틴이 있지요. 헤밍웨이는 스무 자루의 연필을 깎아둔다고도 말했는데요. 선생님께도 루틴이 있나요.

“저는 ‘루틴’이란 단어가 아직도 입에 잘 붙지 않을 정도로 그런 게 없는 사람이에요. 물론 제 일상에는 형식이 있어요. 인생에서는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다고, 아니 형식이 곧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있지만, 글쓰기에는 그런 게 없어요. 어디서든 멈춰 서서 메모를 쌓다가 벼랑 끝에 몰리면 밤낮없이 써요. 루틴이 있다는 건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뜻일 텐데, 그게 없다는 건 제 생산라인이 불안정하다는 뜻이겠죠. 책 네 권이 그렇게 나왔어요. 이건 가족에게도 미안한 일이죠. 이런 사태를 청산해보려고 최근에 마련한 작업실이 바로 이곳이에요.”

그는 최근 글쓰기를 위해 학교도, 집도 아닌 곳에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방 하나, 거실 하나의 작업실이다. 아직 이사한 지 며칠 안 된 작업실은 책장과 책상만으로 이미 빽빽하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에이포(A4)용지를 붙들고 준비 중인 글의 얼개를 정리하곤 한다. 그는 이 백색의 썰렁한 종이와 네임펜을 “연장”, 작업실을 “인식을 생산해내는 곳” “공장”이라고 불렀다. 과연 ‘대목장’이다.

-글 쓸 때 선생님은 어떤 모습인가요?

“보다시피 제 작업 공간은 화려하지도 운치 있지도 않아요. 삭막한 사무실이거나 너저분한 공장이에요. 예쁜 문장을 적어나가는 곳이 아니라 인식을 생산해내는 곳이니까요. 저에게 우아한 루틴이 없듯이 제 작업과 관련된 특별한 소품도 없어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웃음) 소품이 아니라 연장이 있죠. A4용지와 네임펜 같은 것. 줄 없는 흰 종이여야 해요. 메모 자체가 설계도처럼 구조를 얻어나가니까 공간이 넓어야 해서요. 그리고 네임펜은 노안이 온 뒤부터 즐겨 써요.(웃음) 옅은 펜으로 쓰면 제가 메모한 생각마저 허약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광주광역시 남구에 마련한 신형철 작가의 작업실. 책장으로 가득 차 발 디딜 곳도 여의치 않다. 김진수 선임기자

광주광역시 남구에 마련한 신형철 작가의 작업실. 책장으로 가득 차 발 디딜 곳도 여의치 않다. 김진수 선임기자

글이 막힐 땐 다시 처음으로

-방대한 문헌들을 보실 텐데, 필요한 문장이나 자료를 아카이빙해두는 선생님의 노하우가 있을까요?

“적재적소에 적절한 문장을 인용하는 능력은 정말 부럽죠. 아주 옛날에는 책에서 밑줄 친 문장만 따로 어딘가에 적어놓기도 하고 그랬어요. 오래 못 가더라고요. 하나라도 더 읽어야 해서 읽은 걸 정리할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인용문을 너무 소중히 품고 있으면 글이 그걸 살리기 위해 움직이게 돼요.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죠. 이제는 일단 인상적인 문장이 있으면 머릿속에 궁서체로 적어두고 나중에 운 좋게 떠오르기를 바라는 식이에요.”

글이 잘 넘어가지 않는 순간이 그에게도 있다. 그럴 때도 그는 스스로에게 준엄하다. 신형철은 “제 경우 글이 막힌다면 그건 무슨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준비 부족의 냉혹한 귀결일 뿐일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럴 때 그는 작품이나 자료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처음인 듯 들여다본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탁 끊듯이 해결하는 게 아니라 엉망으로 꼬인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 헤치는” 방식이다. 흥이 나지 않아 쓰기 싫어질 땐 “클래시컬한 명문들을 읽는다”고 했다. 그가 존경하는 비평가들이다. 최근엔 서영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왜 읽는가>), 황종연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명작 이후의 명작>)의 신작을 읽는다. “클래식이 원래 함대라는 뜻이잖아요. 두 분 책을 읽고 있으면 거대한 함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듯 압도돼요. 질투는 오히려 방해되기 때문에 질투조차 할 수 없는 대상이 필요하죠.”

-‘나의 글쓰기’를 시작하려는 독자에게는 지침이 될 만한 글이 중요한데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해주신다면요.

“글쓰기를 막 시작하려는 독자에게는 에세이를 권하고 싶어요. 에세이가 제일 쉬운 장르여서가 아니라, 생각이 문장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더 투명하기 때문에 관찰하고 배우기 좋을 것 같아서예요. 윗세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듀나의 에세이들. 최근 사례로는 이슬아, 요조 같은 분들의 글이요. 생각이 문장으로 전환될 때 그 사이에 끼어들게 마련인 어떤 비계 같은 게 전혀 없어요. 정신과 육체 사이의 언문일치가 이뤄진 세계 같다고 할까. 저는 그렇게 못 써요. 김훈과 고종석의 1990년대 글을 읽으며 문장의 매혹을 느낀 세대니까요. 그 문학적 문어체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요.”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정확할 뿐 아니라, 삼엄하리만치 살뜰하게 텍스트를 읽어내려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 특히 해석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뭘까요?

“이것도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는데… 최근에 어떤 분이 한 작가를 두고 ‘유명해지기보단 유일해지고 싶은 것 같다’고 쓰신 것을 봤는데, 그 표현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맞아요, 그런 태도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유일하다는 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니까요. 많이들 하는 얘기지만 무난한 글이 가장 안 좋은 글이죠. 그런 글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유일한 존재가 되기는 어렵겠죠. 저도 명심할 일이고요.”

-비평할 때 이런 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누군가 거기에 있다. 여하튼 있을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저런 부류는 도대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존재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이만이 그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 것이다.”(<몰락의 에티카>) 늘 텍스트를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며 읽으시는데요. 그런 선생님께도 마음속 작가가 있나요?

“문장에도 사운드가 있는데, 어떤 내용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그냥 그 사람이 쓴 문장은 언제나 좋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죠. 문장이 보이는 게 아니라 사운드로 들린다고 할까요. 한국어로 글을 쓰는 이 중에도 몇 있어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제 마음속에만 두겠습니다.(웃음)”

신형철 작가는 글을 쓰기 전 백지에 두툼한 네임펜으로 얼개를 적어둔다. 김진수 선임기자

신형철 작가는 글을 쓰기 전 백지에 두툼한 네임펜으로 얼개를 적어둔다. 김진수 선임기자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

-선생님껜 문학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의 영토와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칼럼니스트)의 영토가 있습니다. 두 종류의 글에 깃든 온도가 다르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의식적인 거리인가요?

“짧은 글에선 한 문장도 낭비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딱딱하고 차가워지는 듯도 해요. 그런데 더 중요하게는 칼럼이 현실의 사안을 직접 다룰 때가 있고 그게 대체로 ‘권력의 일’이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문학작품을 읽을 때 해석자는, 조너선 컬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도로 유지되는 협력 원칙’에 근거해서 접근하죠. 이 작품은 뭔가 가치 있는 것을 말한다고 전제하고 그걸 찾기 위해 협력하는 독서를 해요. 그러나 권력의 언행 앞에서는 다른 태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겠죠.”

-제18대 대선 직후 <한겨레21>에 김승희 시인의 시를 소개하며 “희망은 종신형”이라고 쓰셨어요. “대통령은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쓰신 것도 기억나고요. 문인을 포함한 예술인들에겐 보수정권 당시의 외상도 있을 텐데요. 선거 결과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나요? 지금 선생님 마음속에 어떤 문장들이 있나요?

“희망에 대해 몇 번 쓴 적이 있어요. ‘삶에 희망이 있다는 것은,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건 김연수 작가에게서 배운 것이죠.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다.’ 이건 김수영 시인에게서 배운 것이고요. 얼마 전에 리베카 솔닛의 <어둠 속의 희망>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뒀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인과론은 역사가 전진한다고 가정하지만, 역사는 군대가 아니다. 그건 서둘러 옆걸음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 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관계를 깨뜨리는 지진이다.’”

-요사이에는 어떤 공부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히 관심 둔 분야의 저작이 있는지요?

“근래의 관심사는 돌봄이에요. 어떤 계기가 있어서 자주 자문해요. 나는 과연 누군가를 돌볼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고. <인간 실격>이라는 책 제목이 있잖아요. 저것은 ‘인간 자격’에 대한 질문 같아요.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돌봄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적 이슈이기도 하죠. <돌봄 선언>을 읽었는데 저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종의 구별 없이, 배제와 차별 없이, 닥치는 대로 돌봐야 한다고 주장해요. 저자들의 강렬한 표현을 빌리자면 ‘난잡한 돌봄의 윤리학’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동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어렵죠. 이런 것을 고민하고 있어요.”

에필로그

신형철 선생을 만나기 위해 2월부터 그를 섭외했다. 인터뷰를 썩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그가,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한겨레> <한겨레21>과의 오랜 인연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오래 멀리했던 문학에 대해, ‘저 신형철’과 일대일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턱 얹혔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하나의 ‘얼굴’로 만날 수 없었다. 인터뷰를 맡은 내가 인터뷰 직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탓이다. 우리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통화만 하는) ‘음성-타자’, (전자우편과 문자만 주고받는) ‘글자-타자’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신 신형철 선생은 바쁜 수업과 일과를 쪼개어 서면 인터뷰에 응해줬다. 통권호 인터뷰에서 이 인터뷰만 유일하게 서면으로 진행된 배경이다.

인터뷰는 “타자의 타자성”을 깨고 인터뷰하는 존재와 인터뷰당하는 존재가 유일무이한 의미를 다시 쓰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깨지 못한 이번 인터뷰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그는 <몰락의 에티카>에 이은 두 번째 평론집을 “아직 증축·보수 중”이라고 했다. 2016년 1년여간 <한겨레>에 연재한 ‘격주시화’를 작은 책으로 만들어볼까 궁리 중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새 책이 나오면, 그땐 꼭 직접 만나 그의 글짓는 일에 대해 물어보려 한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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