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해적깃발 원조는 템플기사단이었다

신념·결속·감정의 상징에 목숨 걸어온 역사를 살핀 <깃발의 세계사>
등록 2022-02-18 03:59 수정 2022-02-18 11:17

해골 아래 뼈 두 개를 교차시킨 해적 깃발(졸리 로저)은 항해하는 선박에 그 자체로 섬뜩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놀랍게도, 해적기를 처음 내건 이들은 12세기 기독교 수도회인 템플기사단이었다. 깃발은 ‘시돈의 두개골’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시돈 경이라는 템플 기사가 사랑한 여성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사악한 애인이 무덤에서 그녀의 주검을 파내 능욕했다. 그때 허공에서 “9개월 뒤 다시 오면 아들을 만날 것”이란 목소리가 들렸다. 때가 되어 무덤을 열어보니 두 개의 다리뼈 위에 머리가 놓여 있었고, 이후 기사단의 수호 상징이 됐다. 엄청난 부를 소유했던 ‘가난한 기사들’은 대규모 함대까지 거느리며 선박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후 시돈의 두개골 깃발이 또 다른 해적들에게 영감을 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깃발은 가장 강력하고 성스러운 상징이다. 감정이 듬뿍 배인 상징이기도 하다. 인간은 작은 천 조각에 충성을 맹세하고, 신념을 다지고, 강력한 결속력을 느낀다. 깃발이 상징하는 가치를 위해 포화 속에 몸을 던지고 목숨까지 바친다. 국기가 그 정점에 있지만, 꼭 국기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까짓 작은 천 조각이 대체 무엇이길래?

영국의 국제문제 전문 저널리스트인 팀 마셜이 쓴 <깃발의 세계사>(김승욱 옮김,푸른숲 펴냄)는 깃발이 어떻게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서로를 결합 또는 분열시키며 추구하는 가치와 권력욕, 정치, 지향점까지 드러내는지를 면밀히 탐구한다. 원제는 <죽을 만한 가치: 깃발의 힘과 정치학>(Worth Dying For: The Power and Politics of Flags)이다.

지은이는 미국 성조기와 영국 유니언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국기뿐 아니라 십자군 깃발, 아랍 해방기, 나치의 하켄크로이츠(갈고리 십자가), 적십자기, 유럽연합기, 범아프리카주의 깃발, 행성 지구를 올리브 잎사귀가 감싼 유엔기 등 동서고금의 다양한 깃발들을 아우르며 그 유래와 의미, 단합과 분쟁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깃발의 모습은 중국이 비단이라는 신소재를 만들어낸 뒤에야 보편화됐다.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로마 등에서도 깃발을 사용하긴 했지만 비단 발명 이전에 쓰이던 깃발 천은 너무 무거워서 펼쳐 들어올리기 힘들고 바람에 나부끼지도 않았다. 그림이 그려진 첫은 더 무거웠다. 신소재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다니는 관습은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됐다.

깃발의 문양과 색깔, 깃발에 그려진 동식물과 사물과 기호에는 그 집단의 정체성과 지향성이 압축돼 있다. 깃발의 탄생과 변천은 어느 집단의 영락과 명멸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깃발에 얽힌 역사의 큰 흐름과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깨알 같은 지식이 풍부하다. 역사 해석에서 서구 강대국 중심의 시각이 엿보이는 몇몇 대목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 식견을 넓혀준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국경전쟁

클라우스 도즈 지음, 함규진 옮김,

미래의창 펴냄, 1만9천원

국경은 ‘우리’와 ‘타자’를 가르는 절대적 경계이자 힘과 힘이 부딪치는 최전선이다. 기후변화는 자연국경의 모양새를 바꾸거나 영토를 잠식하기도 한다. 국제사회의 승인과 상관없는 국경분쟁도 많다. 영국 지정학자가 근대국가의 국경 형성부터 우주 국경까지 국경의 역사와 국제정치를 보여준다.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

이태수 외 6명 지음, 헤이북스 펴냄, 2만3천원

대선이 코앞이지만, 한국 정치에서 ‘새로운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심각한 불평등을 해소할 소득보장 시스템이 무엇인지, 국민연금을 어떻게 개혁할지, 플랫폼 노동자를 어떻게 보호할지. 이태수, 이창곤, 윤홍식 등 연구자 7명이 지난 2년간 머리를 맞대고 한국 복지국가의 재구조화 방안을 연구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안녕하세요, 비인간동물님들!

남종영 지음, 북트리거 펴냄, 1만6천원

인간은 언제부터 동물을 ‘지배’했을까? 인간은 왜 동물을 애정 또는 혐오할까?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을까? 인류세는 여섯 번째 대멸종과 관련 있을까? 생태·환경 전문 기자가 가축과 반려동물, 동물원 사육 동물, 야생동물까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진지하게 사유하고 친절히 설명해준다.

소셜온난화

찰스 아서 지음, 이승연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2만2천원

인터넷, 소셜미디어, 유튜브까지 인류는 ‘초연결 사회’에 산다. 소통과 공감도 커졌을까? 현실은 정반대에 가깝다. 가짜뉴스와 선전선동, 혐오와 분노가 들끓는다. 글로벌 테크 기업들은 수익 창출에만 골몰한다. 지은이는 지구온난화에 빗대 ‘소셜온난화’라고 경고한 이런 흐름에서 벗어날 방법을 탐색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