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멜로드라마로 생각하고 본다.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이유는 드라마 속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이들은 실존 인물이라 더욱 과몰입할 수 있어서다.”(박혜령·29·여)
“여러 일반인 연애예능 가운데 유독 <나는 솔로>를 챙겨 본다. 연예인 같은 외모와 좋은 직업을 가진 출연자 위주인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평범한 사람들이 나와서 현실적이다.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보기도 한다.”(김승현·43·남)
연애예능 열풍이 불고 있다. 2021년 한 해에만 <나는 솔로> <환승연애> <돌싱글즈> <러브캐처> <체인지 데이즈> <솔로지옥> 등 봇물 터지듯 연애예능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특히 2021년 12월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솔로지옥>은 2022년 초 넷플릭스 전세계 시청 순위 10위권에 들 정도로 외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장르를 제외하고 한국 예능이 넷플릭스 인기 순위 10위 안에 든 것은 처음이다.
<짝>(SBS, 2011~2014)이 출연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으로 폐지된 뒤 한동안 연애예능물은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하트시그널> 시즌1~3(채널A, 2018~2020)을 시작으로 부활했다. 특히 2021년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종류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터져나왔다. 지상파, 케이블, 종합편성채널에 이어 다수의 제작사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까지 가세한 상태다. 연애예능은 1994~2001년 방영된 <사랑의 스튜디오>(MBC)부터 시작된, 오래된 예능프로그램 포맷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왜 끊임없이 나오고, 시청자는 왜 매번 열광하는 걸까.
<사랑의 스튜디오>는 국내 일반인 연애예능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인이 스튜디오에 나와 마음에 드는 상대를 ‘짝대기’로 찍는 방식이었다. 2000년대 초반엔 연예인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예능이 대거 나왔다. <산장미팅-장미의 전쟁>(KBS, 2002∼2003), <강호동의 천생연분>(MBC, 2002~2003), <실제상황 토요일-리얼로망스 연애편지>(SBS, 2004∼2006) 등이다. 그러다 2008년 관찰예능의 포맷에 ‘가상 커플’이라는 설정을 녹인 <우리 결혼했어요>(MBC, 2009~2017)가 나왔다. 2011년 <짝>이 일반인 연애예능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
2014년 종영한 <짝>을 끝으로 잠시 소강상태이던 연애예능은 2018년 <하트시그널>을 통해 부활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더 힐스>(MTV), 일본의 <테라스 하우스>(후지TV)와 유사한 포맷이다. 한강이 보이는 아름다운 집에서 출연자들이 한 달 동안 동거하면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 변화에 집중했다. 보정한 듯한 카메라 필터와 감성적인 배경음악을 입혀 드라마 같은 서사를 담아냈다. <하트시그널>은 큰 인기를 끌어 시즌3까지 방영했다.
이처럼 다양한 연애예능이 쏟아져나오는 이유를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이렇게 분석했다. “일반인이 출연하는 리얼리티쇼는 외국에선 이미 대중화된 포맷이지만 국내에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정서적 토양이 필요했다. 국내 연애예능은 스튜디오 녹화 형식으로 찍거나, 아예 연예인의 짝짓기 형태로 시작했다. 그러다 <우리 결혼했어요>가 처음 관찰카메라를 도입했는데 ‘가상 커플’ 설정을 넣어 실제 연애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짝> 역시 당시엔 예능이 아닌 교양 프로그램으로 편성해 ‘한국판 킨제이 보고서(성생활 실태 보고서)’를 만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다 이제는 관찰카메라가 연애예능뿐 아니라 다른 예능에도 보편화될 정도로 우리 정서에 자유롭다보니 시청자도 남의 사생활이나 연애를 관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낀다.”
“이제 ‘초혼’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못 보겠어. 돌싱 연애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다.” <돌싱글즈>(MBN)의 시청자 ㄱ씨의 말이다. 종편, OTT 등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연애예능의 콘셉트도 다양해졌다. <체인지 데이즈>(카카오TV)는 이별을 고민 중인 커플들이 한집에 모여 살며 각자의 문제를 직시하기 위해 다른 이의 파트너와 데이트해본다는 설정을 내놓았다. <환승연애>(티빙)에서는 이별한 커플들이 한집에 모여 자신의 ‘X’(예전 연인)는 물론이고 새로운 이들과 자유롭게 데이트한다. <돌싱글즈>는 이혼한 출연자들이 나와 재혼을 꿈꾼다.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는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주류’라고 부를 수 있는 취향은 찾기 쉽지 않고, 점점 더 취향은 세분화되기 때문에 연애예능도 돌싱, 헤어진 연인, 체인지 데이트 같은 다양한 콘셉트를 내놨다”며 “지상파가 아니라서 좀더 자유로운 기획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그램 시작 초반엔 파격적인 콘셉트로 화제를 모았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을 시청해보면 뜻밖에 ‘막장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다. <환승연애>는 각 커플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새로운 사람에게 끌리면서도 자신의 ‘X’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서운해하는 감정 등을 세밀하게 묘사해 큰 공감을 얻었다. <돌싱글즈>는 이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되돌아보게 한다. 특히 출연자에게 자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호감도가 떨어지는 모습 등은 불편한 진실이다. <체인지 데이즈>는 연애의 달콤함보다는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서로 어떤 점을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솔로지옥>(넷플릭스)은 연애예능 중에서도 가장 판타지에 가까운 ‘쇼’다. 솔로일 때는 식사 등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지옥도’인 무인도에 머물다가 커플이 되면 ‘천국도’인 최고급 호텔로 탈출할 수 있다. 유튜버, 모델, 헬스 트레이너 등 사실상 연예인에 가까운 외모의 이들이 출연했고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자주 나오는 등 노출 수위도 높다. 그래서 미국 연애예능 <투 핫>의 한국판이라고도 불렸지만 실상은 다르다. 과감한 스킨십 위주의 <투 핫> 등 외국 연애예능과 달리 섬세한 감정 묘사가 주를 이뤄 “역시 유교 국가답다”는 평을 들었다. 이런 점이 오히려 외국인들에겐 인기 요인이 되기도 했다.
출연자들의 화려한 외모와 노출은 프로그램 제작진에게도, 출연자 자신에게도 홍보 수단이 됐다. 그러나 ‘사랑 찾기’가 주된 출연 목적이 아니라고 해서 이들에게 진정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시청자는 없다. 애초에 <솔로지옥>이 판타지를 충족해주는 쇼이자 드라마임을 모두 알고서 즐기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솔로>(NQQ, SBS plus)는 극사실주의에 가깝다.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출연한다. 결혼을 원하는 진정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출연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제작진이 가상의 이름을 부여한다. 촬영 장소도 다른 프로그램처럼 아름다운 집이나 ‘천국도’ 같은 곳이 아닌 평범한 펜션이다.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출연자가 일방적인 공격을 받아도 제작진은 개입하지 않고 데이트 비용도 출연자가 부담한다.
전문가들은 일반인 연애예능의 인기 요인으로 유튜브의 영향을 꼽았다. 연예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에 수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유튜버의 패션과 화장이 광고계에 영향을 주듯이 내 주위에 있는 듯한 사람의 연애와 사생활을 관찰하는 일에 우리 사회가 더욱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김봉석 평론가는 “유튜브 영향으로 미디어 환경이 아예 바뀌었다. 유튜브에 익숙한 사람들은 각본대로 짜인 것보다는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의 사이 지점에 익숙하고 그것을 더 좋아한다”며 “지금 2030세대는 결혼도, 이혼도, 재혼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연애예능을) 브이로그 보듯 무겁지 않게 공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연애예능이 세월이 지나며 진화된 형태로 계속 나왔지만 아쉬운 점도 반복된다. 일단 모든 연애예능은 이성애를 전제로 하며, 대부분의 예능에서 선택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고 여성은 선택을 기다리는 존재로 비친다.
출연자 검증이 어렵다보니 방송 전후로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최근 <솔로지옥>의 출연자 유튜버 송지아씨는 제작 당시 50만 명이던 구독자가 방송 이후 3배 이상 늘어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그가 명품 ‘짝퉁’을 착용하고 나왔다는 시청자 지적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나는 솔로>는 출연자의 무례한 언행으로 몇 차례 논란에 휩싸이며 비판받았고, 출연을 마친 이들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출연 당시의 심정과 문제점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덕현 평론가는 연애예능에서 출연자에 대한 ‘안전망’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반인 연애예능이 연이어 인기를 끌면서 앞으로 나올 프로그램들은 더욱 자극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관찰카메라가 주는 심적 부담은 일반인에게 엄청난데, 프로그램들은 이를 소비한다. 문제는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계속 소비되고 논란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짝> 이후에도 (출연자를 보호할) 안전망이 도입되지 않았다. 방송윤리 차원이든 출연자 보호 측면이든 안전망이 필요하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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