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나랑 땅 보러 가지 않을래?

창을 열면 다른 사람 집 대신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는 꿈을 꾸며
등록 2021-11-07 14:51 수정 2021-11-08 11:36
배우 원빈, 이나영씨가 결혼식을 올린 강원도 정선의 밀밭.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두 사람의 사진을 등신대로 마련해뒀다.

배우 원빈, 이나영씨가 결혼식을 올린 강원도 정선의 밀밭.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두 사람의 사진을 등신대로 마련해뒀다.

감자를 캐고 나니 번아웃이 왔나보다. 10월 초에는 달방 계약을 했던 펜션에서 짐을 다 뺐다. 그리고 진부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5도2촌(5일은 도시, 2일은 시골) 생활을 접고, 주말 동안 문밖에 한 발짝도 안 나가고 넷플릭스와 배달음식으로 연명하거나, 어떤 주말엔 에어쇼를 보러 가는 등 평범한 주말 라이프를 보내고 있다. 농사 이야기를 할 게 없으니, 어쩌다 농사짓게 됐는지 써보도록 하겠다.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에 땅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여량면은 배우 원빈의 고향이다. 그래서는 아닌데, 하여튼 가게 됐다. 4년 전, 어느 일요일 밤이었다. 남편과 KBS2 <다큐멘터리 3일>에 나오는 어딘가 시골 풍경을 보고는 역시 도시를 떠나야 한다며 괜히 네이버 부동산을 뒤져 전국 부동산 시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제주도부터 봤다. 웬만한 데는 다 몇억원씩 하는데 가파도에 1억원짜리 가겟집이 있었다. 관광객 상대로 문어집 하면 어떨까. 배가 들어왔다 나가는 두어 시간 사이 간단하게 한잔할 수 있게 문어초회, 문어튀김, 문어라면 이런 걸 파는 거지. 쓸데없이 자세하게 계획을 세우다가 섬에서도 더 들어가는 섬에 살면 육지가 그립겠지 싶어 접었다.

청산도, 여수, 남해, 통영 등 가봤는데 좋았거나 안 가봤지만 좋다더라 하는 곳들을 훑었다. 통장에 몇억원씩 있는 것도 아니면서 당장 다음주에 계약이라도 할 것처럼 진지하게 물건을 골랐다. 그러다 여량의 그 집을 발견했다. 1억원대에 방 3개, 화장실 2개, 텃밭도 딸렸다. 다음날 부동산에 전화해 집주인 연락처를 받고, 그 주말 집을 보러 갈 시간을 정했다.

마흔이 넘으니 창문 열면 남의 집 창이 보이는 생활이 지겨워졌다. 30대까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더 나은 삶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매일 지하철 혼잡에 시달리며 출근하고 야근하고 술 마시고 살다보니 몸은 늙고 창문을 열면 여전히 남의 창이 보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대로 살면 평생 이렇게 살겠구나. 창문을 열고 이웃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앗 죄송합니다, 하면서. 그런 자각이 들자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생각해보게 됐다. 쾌적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교통체증에 시달리지 않고 창을 열면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렇다면 그런 곳을 찾아 나를 거기로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평소 이런 마음이 있었던지라 뜬금없이 여량면에 땅 보러 가는 걸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렇게 보러 간 집은 아, 음, 나쁘진 않았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걸 정리하고 갈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여량면 여행은 좋았다. 구절리에 가서 레일바이크를 타고 아우라지에 내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다가 원빈이 부모님께 지어드렸다는 집을 구경하고, <삼시세끼> 정선 편을 찍었다는 집을 지나, 원빈과 이나영이 결혼식을 올린 밀밭에 가서 사진도 찍었다.

집 보러 갔다가 뜻밖의 원빈 테마 여행을 즐기고, 예약한 구들방에서 따끈하게 몸을 지지고 다음날 영동고속도로를 타러 진부IC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가다보니 왠지 낯익은 곳이 나타났다. 남편이 “여기 우리 밭 있는 데 아니야?” 해서 보니 어 맞네? 우리 밭을 지나고 있었다.

지나는 김에 한번 둘러나 보자고 내렸다. 비탈밭 가운데 둘이 앉아 있으니 앞산 깎아지른 벼랑이 멋있고 시야가 확 트여 속이 시원했다. 딸에게 최고의 신랑감을 구해주려 나선 생쥐의 결론이 해님·구름·바람·돌부처 돌아 돌아 쥐서방이라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했다.

“여기가 좋네.”

4년 뒤 그 밭에서 감자농사를 짓느라 생고생할 줄은 그땐 우리 둘 다 몰랐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