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의 철이 왔다고들 한다.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 된 건 오로지 서리를 앞둔 탓이다. 여름엔 지상의 더운 공기와 상층부의 차가운 공기가 만나 맺히는 이슬이 가을엔 새벽 온도가 잠깐 영하로 내려가는 사이에 언다. 제아무리 튼튼한 작물도 서리를 맞으면 급격히 시들기 시작한다. 그러니 그 전에 수확해야 한다. 작물도 그걸 아는지 서리가 내리기 전 부지런히 익는다. 내가 사는 세종시엔 시월 중하순께 서리가 내리는 성싶다. 이제 한 달여 남았다.
농사를 짓는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더니 요즘 주변 사람들이 “이제 추수할 때 아니냐. 그 넓은 밭에서 나는 많은 수확물을 혼자 다 못 먹을 테니 좀 나눠주라”며 속없는 소리를 한다.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는 없다. 한여름 뙤약볕에 삐질삐질 바가지땀 흘려가며 키운 작물인데 어떻게 그냥 나눠준단 말인가. 야박하다 타박해도 어쩔 수 없다. 그보단 비닐과 비료를 전혀 쓰지 않는 탓에 애당초 나눠줄 만큼 소출이 많이 나지 않는다. 누가 돈 주고 산다 해도 팔 만큼의 물량이 없다.
무엇보다 일부 도시 사람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게 있다. 모든 작물이 봄에 씨앗을 뿌려 여름에 햇볕과 비를 맞으며 무럭무럭 자란 뒤 가을이 되면 한꺼번에 수확하는 것이라는 간편한 믿음이다. 그렇지 않다. 상추는 봄에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심으면 한여름까지 계속 이파리를 따 먹지만 그새 줄기가 쑥쑥 자라는 ‘추대’가 이뤄져 이맘때이면 키가 허리춤까지 자란다. 더 이상 먹을 게 없다. 열무도 수확 시기가 한참 지났다. 옥수수는 여름걷이를 한 지 오래됐다. 고추도 발갛게 익을 시기가 지났다. 이젠 고춧대를 뽑고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몸에 좋다고 해 내가 과다복용을 서슴지 않는 마늘과 양파는 아직 심을 때가 아니다. 서리가 내리기 전 씨마늘과 모종을 사다 심은 뒤 겨울 동안 얼어죽지 않게끔 볏짚이나 마른풀로 잘 덮어주면 내년 늦봄에 수확한다. 지금 밭에서 한창 생명을 피우는 녀석들이라고 해봐야 배추와 무 정도다. 그나마 배추는 올해 김장하기를 포기해 몇 포기 심지도 않았다. 이번 주말 밭에 가면 뒤늦게 심은 들깨 이파리를 따다 생으로 절여 깻잎절임을 하거나 프라이팬에 양념과 함께 살짝 볶아 향긋한 나물을 먹을 수 있을 듯하다. 곧 까칠한 껍질과 함께 열릴 들깨씨는 잘 받아뒀다 내년 봄에 다시 뿌릴 테다.
시끌벅적했던 올해 농사도 슬슬 마침표를 향해 달려간다. 산뜻한 마음으로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비지땀 쏟으며 애써 가꿨는데, 돌아보니 손에 쥔 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래도 전례 없는 감염병 창궐에 많은 이가 힘든 이때 그럭저럭 한 해 무탈하게 먹고 살았으니 참으로 다행이고 소소하게나마 내년을 다시 기약할 수 있으니 이 또한 행운이 아닌가 싶다.
21세기 들어 벌써 스물한 번째 한가위를 맞는다. 시간이 빠르다. 옴짝달싹하기 어려운 시대, 독자 여러분 모두 풍성하고 평화로운 수확의 계절을 맞기 바란다. 곧 서리가 내리면 세상은 또 움츠러들 테다. 이 틈을 비집고 감염병이 겨울걷이에 나서지 않기만 빌 뿐이다.
글·사진 전종휘 <한겨레> 사회에디터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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