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남해안의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수목 울창한 언덕과 짙푸른 바다, 중첩한 섬들이 놀라운 경관을 만든다. 그곳은 16세기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이순신 장군의 도시이기도 하다. 지명 자체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이다. 그뿐인가. 윤이상, 박경리로 대표되는 예술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은 그곳에서 나거나 교육받았으며 결혼도 하고 가족을 잃기도 했다. 통영 골목길에는 그들 삶의 체취가 배어 있다.
이제 한 사람을 추가해야 하겠다. 바로 방준표(方俊杓)다. 6·25전쟁 때 전라북도 도당위원장으로서 빨치산을 이끌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통영’이라 쓰고 ‘토영’이라고 발음하는 현지 토박이다. 이력서처럼 중요한 문서에조차 통영을 가리켜 저도 모르게 ‘토영’이라고 잘못 적곤 했다.1 일제하 행정구역 명칭으로 하자면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 346번지’가 그의 본적이자 출생지였다. 거기서 1906년 4월28일에 태어났다. 지금도 이 주소지는 남아 있다. 이순신 사당인 충렬사 정문에서 멀지 않다. 150m쯤 떨어져 있으며, 걸어서 2분 거리다.
그의 형제자매는 남녀 9명이었다. 방준표는 그중 둘째 아들이었다. 당시 풍속으로는 자손이 번성해 다복한 가정으로 여겨질 만했다. 그렇더라도 대식구였다. 식솔을 거느리는 아버지 방한정은 해산물 상점의 사무원이었다. 하지만 ‘술 잘 먹는 사람’이었다. 가정 형편이 빈궁했다고 한다. 어머니 공재복이 생업에 나서야 했다. 그녀의 바느질품 노동이 가정을 지탱하는 한 기둥이 됐다.
방준표는 통영에서 서당을 3년간, 보통학교를 6년간 다녔다. 중등학교 진학차 서울로 향하던 17살 때까지 그 도시에서 성장했다. 유학 중에도 방학만 되면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과 어울렸다. 유학 4년차이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고향에 내려와서 통영수해구제회 활동에 참여했다. 간부 1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간부들이 3대로 대열을 나누어 통영 각지에 나가서 모금 활동을 했다. 그는 ‘재외유학생학우회’ 대표 자격으로 통영면 일대를 순회했다.
방준표가 해방운동에 처음 참가한 곳도 고향인 통영이었다. 1929년 24살 때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본격적이라 함은 다른 직업 없이 그 일에 전업적으로 종사했음을 뜻한다. 그해 8월 통영청년단 위원장 자리에 취임한 것은 그 상징이었다.
본래 통영청년단은 3·1운동 참가자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합법 공개 영역의 청년단체였다. 만세시위운동이 사그라들던 1919년 7월 발족한 이후 통영 지역사회의 공개 대중운동을 이끌어가는 주도체 역할을 했다. 1923년에는 벽돌로 번듯한 2층짜리 회관 건물까지 건축할 만큼 현실적 영향력을 갖췄다.
위원장 방준표가 걷는 길은 험난했다.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를 제집 드나들듯이 빈번하게 출입했다. 신문에 단편적으로 실리는 지방 기사만 훑어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위원장 취임 두 달 뒤인 그해 10월9일에 통영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가택수색을 당했다. 같은 달 21일에는 결국 체포됐다. 이번에는 동래경찰서 고등계였다.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간부 노덕술 경부가 지휘하는 수사망에 포착돼 부산까지 압송당했다. 동래청년동맹과 통영청년동맹 간부들이 비밀결사 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는 혐의였다. 10월28일에는 청년 12명이 검사국에 송치됐는데 증거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부산형무소 구치감에 수용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11월6일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2
수난은 계속됐다. 이듬해인 1930년 8월1일 경찰에게 또 체포됐다. 청년동맹회관에서 통영학생회 정기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회관 한편 흑판에 ‘오늘은 적색 데이’라는 불온 메모를 의도적으로 기재해놨다는 혐의였다. 1932년에도 그랬다. 메이데이를 며칠 앞둔 4월26일 반일 격문이 발각돼 검거 선풍이 일었다. 통영 사회운동의 주요 간부 15명이 체포됐는데, 방준표도 포함됐다. 취조가 시작된 지 20여 일 지나 혐의자 가운데 3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방준표는 마지막날까지 취조받은 유력한 혐의자였으나, 다행히 송치자 명단에는 들지 않았다.3
방준표는 그해 말에 또 검거됐다. 12월13일이다. 당시 그의 지위는 통영노동조합 간부였다. 어느 땐가 청년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활동 분야를 옮겼던 것 같다. 혐의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조합 간부 3명, 소비조합 간부 4명을 검거한 것을 보면 통영지역 사회운동과 관련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통영은 방준표에게는 어머니 같은 곳이었다. 객지에 나가서 병에 걸리면 치료차 되돌아오는 곳이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호흡기질환을 자주 앓았다. 일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병이 악화하곤 했다. 첫 직장인 부산보통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하던 중에도 그랬다. 교장과의 불화도 원인이 됐지만, 병 치료를 위해 고향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1929년 4월부터 10월까지 통영에 머물면서 치료에 전념했다. 24살 때 일이다.
35살 때도 그랬다. 서울에서 노동운동에 종사하던 중 폐질환에 걸렸다. 폐디스토마로 심한 각혈을 거듭했고 더는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그가 선택한 길은 귀향이었다. 1940년 4월부터 1942년 3월까지 무려 2년 동안이나 병고에 시달렸다. 하지만 병석에 오래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생계를 세워야 했다. 11년 연하의 어린 아내 ‘김정’이 있었고, 뒷날 세 아이를 얻었다. 뭔가 일해야 했다. 통영읍내 정미회사, 밀양읍의 인쇄소와 밀양의원 등에서 사무원이나 직공으로 일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식민지 수도 서울은 방준표에게는 가슴 설레는 중등학교 유학지였다. 17살 청소년 방준표는 1922년 이제 막 개교한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식민지 시기에 설립한 최초의 관립 사범학교였다. 인기가 매우 높았다. 입학생은 학비를 전액 면제받고 매달 생활비를 지급받았기 때문이다. 졸업 뒤에도 보통학교 교사로 취업이 보장됐고, 판임관 관등의 교육 관료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렵고 머리 좋은 학생들에게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방준표에게도 그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집안 형편은 상급학교로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서울에서 사범학교가 설립돼 관비로 학생 모집을 하”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4
입학 시험은 매우 어려웠다. 방준표가 응시한 1922년도 입학정원이 102명이었는데, 응시자가 733명이었다. 대략 7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민족별로도 입학정원이 할당돼 있었다. 대부분은 일본인 몫이었다. 조선인 합격자는 10명에 불과했다. 1922년 당시 조선인 응시자는 221명에 달했다. 상위 4.5%에 들어야만 했다.5 일본인 학생들이 뒷날 남긴 기록을 보면, 경성사범의 조선인 학생은 엄청난 입시 경쟁을 통과한 ‘진정한 수재’였다고 회고했다.
경성사범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모든 학생이 원칙적으로 기숙사에 입사해야 했다. 황금정(을지로5가)에 위치한 캠퍼스에는 기숙사 3개 동이 있었고, 방 하나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고 12명의 학생을 수용했다. 기숙사 학생들은 고도로 통제된 단체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밤 9시에는 야례(夜禮)라고 부르는 점호에 참석해야 했다. 각 방에는 상급생과 하급생 사이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상급생에게는 존칭으로 ‘~상’을 붙이고, 하급생에게는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오셋쿄(說敎)라는 집단 뭇매가 있었다. 단체기합이었다. 군대 내무반 생활의 복사판이었다.
방준표는 이 사범학교에서 6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다. “전부 일본인 학생이었고 조선인 학생은 1할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놈들의 민족차별 대우에, 특히 민족적 자각과 일제에 대한 증오를 느꼈다”고 술회했다. 졸업에 즈음해서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들을 탐독했다.
방준표가 사회주의를 수용한 배경에는 경성사범학교 체험도 있지만, 가족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8살 위 큰형 방정표(方正杓)는 통영 3·1운동에 참가한 열혈 청년이었고, 통영청년단 창립멤버이기도 했다. 1920년대 중엽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 정화회(正火會)에 참가해 기관지 <횃불> 편집인으로 일했다. 결국 필화사건에 연루돼 사상범으로 재판까지 받았다.
1920년대 중후반기 서울에서의 학창생활은 방준표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가져다주었다. 서울은 그에게 사상의 고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울은 방준표에게 노동운동의 무대이자 비밀결사운동의 거점이었다. 그가 서울에서 노동운동에 참가한 것은 29살 때였다.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1934년 조선 사람은 조선에서 일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끼고 조선으로 나와 고향을 거쳐 서울에 왔다. 인쇄직공 견습으로부터 시작하여 6년 동안 기계공 노릇을 하면서 조선인쇄주식회사, 서적회사, 곡강인쇄소, 영등포 기린맥주공장, 용산철도공장 노동자 속에 공산주의 그룹 조직 활동을 했다.” 6
1934년 5월부터 1940년 4월까지 6년 동안 서울에서 적색노동조합 운동에 참가했다는 진술이다. 서울로 상경하기 전에는 일본에서 얼마간 사회주의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도쿄에서 토목노동에 종사하면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일본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한다. 아직 그에 관한 정보가 충분히 발굴되지 않았지만, 그런 활동 경험이 서울의 적색노동조합 운동에도 활용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활동 구역은 영등포와 용산이었다. 서울에서 노동자가 가장 밀집한 대표적인 공장지대였다. 방준표는 인쇄직공 일을 익혔다. 이 기술은 노동운동에 매우 유용했다. 합법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쇄소·서적회사 등에서 조직 활동을 하는 데 꼭 필요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맥주공장, 철도공장 등 타 분야 노동자 사회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특히 철도공장 노동자 내부 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다음 연재에 계속)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1. 방준표, ‘간부리력서’, 1948. 8.10.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3об
2. ‘동래청년 12명, 검사가 석방’, <동아일보> 1929. 11.9.
3. ‘통영격문범 3명은 송국’, <동아일보> 1932.5.18.
4. 김준(방준표), <자서전>, 1948. 8.10.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4~16об
5. 안홍선, ‘경성사범학교의 교원양성교육 연구’, 서울대 교육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4, 154쪽
6. <자서전>,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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