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SF 2021: 판타지 오디세이’ 전시회에 다녀왔다. 언니 없이, 언니의 친구들과 함께. 언니는 중고등학교 때 집에 친구들을 불러 노는 일이 많았다. 그만큼 가까운 친구들이라서 내가 아프게 될 때 같이 힘들었던 언니를 지켜봐줬다. 그래서 처음부터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아프게 됐는지, 어떤 감정인지 ‘전달’하려 요약해서 말하지 않아도 됐다. 상대가 내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말하는 건 큰 기쁨이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일상 이야기. 나에게 무난한 하루하루를 말했다. 언니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서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말하기 편한 사람들과 많이 이야기하다보니 부쩍 친해져서, 언니 없이도 언니 친구에게 곧잘 연락하고 대화할 지경이 됐다. 그렇게 잡은 약속이 이 전시회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SF(공상과학)를 잘 모른다. 관련 작품도 거의 모른다. 세상에 그런 장르가 있고, 그것이 때로 기괴하고 때로 아름답다는 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이번 전시회를 다녀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는 소리와 영상과 그림들. 어쩌면 지구가 한 번은 뒤집힌 뒤의 미래일지도 모르고, 아득한 과거와 맞닿은 것 같기도 한 형상을 봤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민들레 그림이었다. 제목과 함께 보면 더 인상적이라고 같이 간 언니의 친구 한 명이 말해줬다. 하지만 제목이 눈에 들어올 겨를이 없었다. 인삼처럼 생긴 뿌리를 가진 노란 민들레. 씨앗이 퍼지는 그림도 있었고 퍼지지 않는 그림도 있었고 서로 만나는 그림도 있었다. 민들레 씨앗이 서로 만나는 그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전시회를 다녀온 뒤 학교 수업을 듣다가도 문득문득 생각났다. 민들레 씨앗이 서로 만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인 것 같다.
민들레 씨앗 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와 함께 민들레 씨앗 중에서도 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은 ‘완(完)들레’, 반만 있는 것은 ‘반(半)들레’,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하얀 줄기만 남은 것은 ‘간들레’라고 불렀다. 짙은 초록색의 잔디밭 사이사이에, 아스팔트 틈새에 싹튼 민들레는 질기게도 자란다. 노란 꽃을 점점이 피워내다가 씨앗을 세상으로 날려보낸다. 번식을 위해 제 일부분을 강하게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씨앗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막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처음과 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두 씨앗이 만나서,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쁘게 나눌 것 같다. 어디서 왜 출발했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이미 유대감이 싹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병에 그렇게 큰 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미 병이 있기 전과 후로 명료히 나뉘는 것 같다. 병을 앓는 일이 나에게 거대한 성장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많은 것을 잃게 했고 처음부터 알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때때로 느끼게 했다. 병에 걸린 뒤 새로운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일이 곤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특히 그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아픔에 대해 병을 앓기 전보다 후에 훨씬 쉬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아픔의 처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의 틈새 민들레처럼 산뜻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노란빛 환희 였다.
신채윤 고2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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