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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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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감각’이 관음증의 첨병이라니

고대 그리스부터 n번방까지 타락한 감각의 역사 다룬 <시각의 폭력>
등록 2021-05-02 11:56 수정 2021-05-07 01:51

오늘날 성폭력은 그 순간에 그치지 않는다. 망원경, 카메라, 컴퓨터, 인터넷 같은 과학기술을 도구 삼아 동영상물로 대량 복제되고 확산되고 소비된다. 디지털성범죄는 거대한 성착취 산업이 됐다. 최근 엔(n)번방 사건은 최악의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주로 시각물로 소비되는 디지털 성착취물은 여성의 영혼을 거세하고 몸을 사물로 대상화한 엿보기, 관음증의 극단이다. 시각은 인간의 오감 중에서 독보적이다. 청각과 후각은 그 범위가 제한적이다. 촉각과 미각은 사물과 직접 닿지 않으면 대상을 알 수 없다. 반면 시각은 눈앞의 찰나를 훑는가 하면 멀리는 25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에 가닿는다. ‘보는 것이 믿는 것’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도 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쩌다 시각은 오염되고 불순한 감각이 되고 말았나? 페미니즘 철학자 유서연이 쓴 <시각의 폭력>(동녘 펴냄)은 바로 이런 질문을 파고든 책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n번방까지 타락한 감각의 역사’(부제)를 면밀히 살피고, 시각에 작동하는 권력의 맥락을 드러내 보인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둔 서양철학은 시각을 ‘고귀한 감각’으로 일컬으며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다. 플라톤이 <형이상학>에서 영원불변의 본질로 추구한 ‘이데아’ 개념은 ‘보다’ ‘알다’라는 뜻의 낱말 ‘이데인’(idein)에서 파생했다. 본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이었고, 시각은 인식의 결정적 매개였다. 주체가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시각은 이성적 인식 기능을 갖춘 고급 감각이자 남성적 감각으로 간주됐다. 반면 “촉각·미각·후각 같은 접촉 감각은 저급한 감각이자 여성적 감각, (…) 탐닉이나 즐거움과 관련된 동물적 감각”으로 여겨졌다. 오이디푸스가 친모 간통의 신탁이 실현됐음을 깨닫고 탄식하며 제 눈을 찌른 것은 거세의 은유다.

‘보는 자’는 ‘보이는 자’보다 우위에 있다. 본다는 것은 곧 대상을 통제하는 힘이다.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예시한 원형감옥 파놉티콘은 그 전형이다. 육안의 한계를 보완한 첨단 광학, 디지털 장비는 ‘모든 것을 보겠다’는 근대적 욕망의 결과이자 연료다. 남근주의로 표상되는 가부장제에서 욕망과 권력은 대개 지배계층 남성의 몫이다. 근대 이후 ‘시선 권력’의 피지배자 자리에는 제3세계 피식민지인, 여성, 장애인 등이 빠지지 않았다.

지은이는 프랑스 여성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가 주창한 ‘촉각적 시각’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오목거울을 장착한 산부인과 검시경이라야 평면거울로는 볼 수 없는 접촉적 관찰이 가능한 이치다. 촉각은 자궁 속 태아에게 시각에 선행하는 원초적 감각이며, 주체와 객체가 서로를 넘나들며 교환하는 감각이다. 촉각적 시각은 이처럼 일방이 대상을 타자화하는 위계 권력이 아니라 서로를 맞잡는 포용적 감각이라는 것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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