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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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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필운대’는 이항복의 집이 아니었다

16세기 권철부터 20세기 이회영까지 서울 종로구 필운대 부근에 이어져온 가치
등록 2021-04-25 13:43 수정 2021-05-11 15:58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 가운데 ‘필운대’. 간송미술관 소장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 가운데 ‘필운대’. 간송미술관 소장

“필운대는 도성 안 인왕산 아래에 있다. 오성 이항복이 젊은 시절 필운대 아래 도원수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자호를 필운이라고 했다. 지금에도 암벽에 ‘필운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성의 글씨라고 한다.”(유본예, <한경지략>)

2021년 2월26일 서울 종로구 행촌동 사직터널 언덕 위 서양식 주택 ‘딜쿠샤’가 1923년 첫 모습으로 복원돼 공개됐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미국 <에이피>(AP) 통신사 비정규 특파원인 앨버트 테일러의 집이었으나, 테일러 가족이 1942년 추방된 뒤 오래 방치돼 있었다. 2017년부터 서울시가 복원 사업을 벌여 이날 문을 연 것이다.

사진2. 서울 종로구 행촌동 사직터널 언덕 위에 자리한 서양식 주택 ‘딜쿠샤’.

사진2. 서울 종로구 행촌동 사직터널 언덕 위에 자리한 서양식 주택 ‘딜쿠샤’.

딜쿠샤 사진에도 보이지 않는 권율의 집

그런데 이 집에서 15m 정도 떨어진 곳에 나이 450년이 넘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그 앞엔 ‘권율 도원수 집터’라는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16세기 중반에 심긴 이 은행나무는 권율(1537~1599) 장군의 집 안에 있던 것이다. 조선시대 권력가의 집 규모나 이 언덕의 지형을 고려하면 딜쿠샤도 권율 장군 집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사진을 보면 딜쿠샤가 들어선 언덕에 다른 집이 보이지 않는다. 권율의 집도 사라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권율의 집은 도성 밖인 여기 말고 도성 안에도 있었다. 바로 서울 종로구 필운동 필운대(弼雲臺)다. 통상 필운대는 이항복(1556~1618)의 집으로 알려졌지만, 유본예의 <한경지략>은 그 집이 원래 권율의 집이었다고 적었다. 이항복 집은 현재의 필운대 바위 앞 배화여고 건물 자리쯤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때 서울 사람들이 봄에 꽃구경하던 필운대는 이제 배화여고 건물에 답답하게 막혀 있다.

그런데 좀더 들여다보면 필운대의 이항복 집은 원래 소유자가 권율이 아니라, 권율의 아버지 권철(1503~1578)로 보인다. 여러 기록에서 이항복과 같은 동네에 살면서 그를 아끼고 손녀 사윗감으로 점찍은 사람은 권철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권철은 이항복의 아버지인 이몽량(1499~1564)과 친구였으며, 정승을 여러 차례 지낸 유력자였다. 이몽량이 죽은 뒤 어린 이항복을 후원했을 가능성도 크다.

반면 장인 권율은 이항복을 사위로 들일 때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한 상태였다. 심지어 과거 기수도 19살 아래인 사위 이항복의 2년 후배였다. 이항복을 사윗감으로 고르고 집을 물려줄 처지가 못 됐다.

이항복은 1573년 권철의 손녀, 권율의 딸과 혼인했다. 1575년 초시에 합격했으며, 1580년 대과에 합격했다. 1573년 혼인 뒤 이항복은 처할아버지 권철의 필운대 집에 처가살이하면서 과거에 합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철은 1578년 세상을 떠났고, 권율은 1582년 대과에 합격했다.

사진3. 배화여고 건물 뒤에 자리한, 필운대(弼雲臺).

사진3. 배화여고 건물 뒤에 자리한, 필운대(弼雲臺).

이항복은 국방부 장관, 장인은 합참의장

임진왜란 때 권율이 도원수가 된 것도 사위 이항복의 덕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이항복은 친구 한음 이덕형과 번갈아 병조판서를 맡았다. 사위와 사위 친구가 국방부 장관일 때 장인이 합참의장에 임명된 것이다.

이항복 본가는 필운대 바로 아래에 있는 홍건익 가옥(서울시 민속문화재) 터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렇다 할 근거는 없다. 다만 홍건익 가옥과 환경운동연합 건물 사이에 서 있는 400년 이상 된 거대한 회화나무가 이곳이 비범한 집터임을 암시할 뿐이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류성룡, 이덕형 등과 함께 중책을 맡아 전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광해군 시절엔 영창대군 살해나 인목대비 폐위 등 북인 당파의 극단적 정치에 반대하고 온건론과 초당파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광해군과 북인들에 찍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된 뒤 숨졌다.

이항복의 이런 합리적 태도는 사후에 높이 평가받았고, 그를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의 후손도 온건론자인 소론에 속한 경우가 많았다. 이항복은 유머가 넘치는 인물이어서 권철, 이덕형, 선조 등과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사랑받는 정치인이었다.

이항복의 후손 중에는 정승·판서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후손은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등 일제 때 독립운동가 6형제였다. 6형제는 조선이 망한 뒤 엄청난 재산을 팔아 간도로 망명했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냈다. 특히 우당 이회영(1867~1932)은 무장투쟁과 무정부주의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이회영 일가의 활약에 대해서는 월남 이상재의 평가가 유명하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6형제처럼 일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하다. 장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사진4. 이회영과 부인 이은숙이 국내에서 활동할 때 머물던 서울 종로구 통인동 윤복영의 집.

사진4. 이회영과 부인 이은숙이 국내에서 활동할 때 머물던 서울 종로구 통인동 윤복영의 집.

이사 가는 우당기념관, 그 숨겨진 인연

이회영의 독립운동 자취는 선조인 이항복의 필운대 집 근처에 남아 있다. 이회영은 1913년과 1918년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 위해 국내에 몰래 들어왔다. 그때 숨어 있던 집 가운데 하나가 망명 전 제자인 윤복영(1895~1956)의 종로구 통인동 집이었다. 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1925년 국내에 들어와서 머물던 곳도 윤복영의 집이었다. 그래서 이회영 일가의 본적은 종로구 통인동 128번지로 정해졌다. 윤복영의 아들이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이다.

필운대 일대와 권철, 권율, 이항복, 이회영 집안의 긴 인연은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으로 이어졌다. 이 전 원장은 1987년 종로구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종로구 신교동으로 이사했고, 2001년 자택 1층에 우당기념관을 열었다. 신교동은 이항복의 필운대, 이회영의 통인동 제자 집과 가까운 곳이다. 2010년 우당기념관 앞을 지나는 길의 이름이 ‘필운대로’로 정해졌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우연히 조상이 살던 본향으로 돌아왔다. 필운대 일대는 과거에 권력과 가까웠고, 수많은 역사가 일어난 곳이다. 필운대나 딜쿠샤 일대에서 옛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앞으로는 잘 가꿔나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당기념관은 2021년 6월께 20년의 신교동 시대를 마치고 중구 예장동 옛 중앙정보부 6국 터로 옮겨간다. 이곳은 이회영 6형제가 망명 전 모여 살던 서울 중구 저동과 300m 거리에 있다.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마련한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마련한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

글·사진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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