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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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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나의 시절, 나의 집

“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되었을 그 집” 하재영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등록 2020-12-05 15:10 수정 2020-12-07 23:19

첫 번째 집은 대구 북성로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읍성을 무너뜨리고 낸 신작로였다. 상가 사무실을 통과해 들어가면 마당이 나오는 독특한 구조였다. 2000년대 상경한 동생과 살림을 합쳐 들어간 서울 금호동 집에는 돌출창이 있었다. 1990년대에 지은 주택에 흔한 것이었다. 소설가 하재영은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이프앤페이지 펴냄)에서 대구 북성로 집에서 서울 구기동의 빌라까지 자신이 거처한 집들의 경로를 그렸다.

집은 그대로 시대다. 대구 북성로 집에는 방공호 비슷한 지하실이 있었고 식탁 중앙에는 중국요릿집 같은 회전판이 놓였다. 집은 시대의 기운도 포함한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설을 쓰거나 14인치로 텔레비전을 보던 자발적 감금 상태일 때 바깥세상에선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쓰레기를 내놓는 잠깐 동안에도 불안이 엄습했다.

집은 가장 부끄러운 기억을 안은 공간이다. 금호동 돌출창 앞에는 화분을 두고 싶었다. 빨랫대를 구겨넣고 이불을 침대에 넣고 30개들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커튼으로 가리는 처지에 가당치 않았다. 창 앞은 선풍기 수납 공간이 되었다. 6년간 아홉 집이라기보다는 방을 전전한 뒤 얻은 집에는 뭐든 감추고 싶고 과장하고 싶은 시절이 담겼다.

집은 작가와 같이 성장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쪽이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아등바등 집을 고치고 있단 말이야? 월셋집을? 누구 좋으라고?” 월셋집을 ‘셀프 인테리어’ 할 때 그전 집주인(같은 처지의 임차인)은 그렇게 비웃었다. 하지만 그 시절이야말로 그가 자신으로 온전히 살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던 때였다. 그렇게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 되자, 결혼할 생각도 들고 프러포즈도 하게 된다.

작가의 현재 집은 가족의 역사를 안고 있다. 언제나 책을 곁에 두고 읽는 건 엄마였지만 서재라는 공간은 아버지 차지였다. 거실을 서재와 집필실로 활용하는 것은 공간의 정치학을 해체한 뒤 얻은 결과였다. 그 집은 호텔 사업이 부도나서 트럭 기사 등으로 일했지만 공간에 관심 있는 아버지가 인테리어를 직접 관장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북성로의 소중한 물건을 몇몇 옮겨왔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브랜드 아파트의 광고는 일면 옳다. ‘당신이 사는 곳’이 ‘브랜드’가 아닌 ‘집’이라면 말이다. 책에는 우리가 종종 뉴스에서 만나는 숫자로만 대표되는 집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집들은 내가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지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쓰였다.” 책을 읽으면 누구나 자신의 집을 소환해낼 것이다. 신기하게도 장소에 엮여 잊었던 일기도 고구마처럼 딸려온다. 집이 숫자로 구성되지 않는 이유는 넘친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 1만8천원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미국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 신화’의 치명적 결함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성공이 오롯이 개인 몫은 아닌데다 새로운 신분 세습이란 사실은 감추려 한다.


노래가 필요한 날

김창기 지음, 김영사 펴냄, 1만4800원

그룹 ‘동물원’ 출신 정신건강 전문의인 지은이가 나·사랑·관계·마음·인생 다섯 주제로, 국내외 대중가요 77곡을 추려 간략한 소개와 잔잔한 에세이를 곁들였다. <혜화동>(동물원), <바람이 분다>(이소라), <잊혀지는 것>(김광석), <작은 것들을 위한 시>(BTS), <어니스티>(빌리 조엘) 등.


여기, 사람의 말이 있다

구정은·이지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1만8천원

현직 국제부 기자들이 지구촌 곳곳의 “여성, 이주민, 원주민, 소수자 등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그럴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과 인류 공생에 앞장선 지도자들의 육성을 통해 오늘날 세계의 절박한 현안을 톺아본다. 헬렌 켈러, 맬컴 엑스, 인도 빈민, 아프리카 원주민 등 24명이 전하는 메시지들.


푸도폴리

위노나 하우터 지음, 박준식·이창우 옮김, 빨간소금 펴냄, 2만5천원

미국의 먹거리 감시 시민단체 대표가 현대 소비자본주의에서 소수 대기업이 먹거리를 이윤 창출 수단으로만 보고 생산과 유통을 독점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건강을 해치는 구조를 폭로한다. ‘푸도폴리’는 음식(food)과 독점(monopoly)의 합성어, 즉 ‘먹거리 독점’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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