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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하얀 장미를 키우는 정원

등록 2020-10-31 09:15 수정 2020-11-01 01:4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며칠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렸던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이 정계를 은퇴했다. 그의 나이 85살. 코로나19로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무실에서 일하는 건 정치가 아니라며 내린 은퇴 결정이었다. 무히카는 퇴임 연설에서 “수십 년간 내 정원에 증오는 심지 않았다. 증오는 어리석은 짓이다. 인생의 큰 교훈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우루과이의 호세, 쿠바의 호세

스물아홉에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던 도시 게릴라, 13년간 수감됐던 정치범, 이후 우루과이 좌파 정부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가 어떤 시간을 관통해왔는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그의 퇴임 연설을 들으면 쿠바의 시인 호세 마르티가 떠오른다. 나는 이 시인을 어느 서점 구석에서 발견한, 한·중남미협회 지원으로 출간된 작은 시집을 통해 만났다. 무히카가 말한 ‘정원’에 마르티는 ‘하얀 장미’를 길렀다.

“하얀 장미를 기르네/ 7월에 마치 1월처럼/ 내게 손을 내미는/ 신실한 친구를 위해// 내게서 심장을 빼앗아가는/ 비정한 이를 위해/ 엉겅퀴도 쐐기풀도 아닌/ 하얀 장미를 기르네”

노벨문학상을 받은 칠레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호세 마르티를 ‘증오를 지워버린 투사’라고 불렀다. 마르티는 열여섯 학생 시절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인 쿠바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썼다가 체포돼 끔찍한 수형 생활을 했다. 이후 스페인·멕시코·미국 등을 돌며 추방과 망명 생활을 거듭했고, 사랑하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스페인 군대의 기습으로 사망했다. 쿠바 사람들은 그런 마르티를 독립운동가로, 교육자로, 철학자로, 시인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마르티가 기르겠다고 한 하얀 장미는 반세기 이후 다시 피어났다. 2016년 3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 88년 만에 쿠바를 방문했다. 수도 아바나의 오래된 대극장 무대에 오른 오바마가 처음 내뱉은 서툰 스페인어 문장은 바로 “하얀 장미를 기르네”(Cultivo una rosa blanca)였다. 과거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겠다는 우애를 이토록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말은 없었다.

무히카의 정원과 마르티의 장미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한 주 내내 무히카가 남긴 “내 정원에 증오는 심지 않았다”는 말은 전세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돌아다녔다.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혐오와 증오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에 맞서기 위한 교육과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혐오와 증오가 더 강해지고 있기에, 더 강도 높은 처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 와중에 혐오와 증오를 받아들이지 않는 정원은 어떤 모습일지, 적에게도 건넬 수 있는 장미는 어떤 빛깔인지에 대한 상상력은 점점 옅어진다. 옅어진 상상력으로는 현실의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혐오와 증오가 없는 정원

무히카는 실용 노선으로도 이름난 대통령이었다. 불법 마리화나 밀거래 시장을 바탕으로 범죄조직이 활개 치자, 그는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직접 마리화나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통해 범죄를 없애는 방법을 선택했다. “금지만으로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무히카의 마리화나 농장이야말로 바로 하얀 장미를 키우는 정원이 아니었을까. 그런 정원은 또 어디에 있을까.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싶다.

김보경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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