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 사랑한 작가 박준① “무인도에 혼자 남아도 시를 쓸 것 같아요”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16.html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두 번째 시집 ‘종암동’ 중)
그의 시는 암송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시구가 많다. 그 아름다움의 원천은 어디일까. “시적 미감을 아버지에게서 배웠어요.” 시인의 아버지는 그의 시에서 시인처럼 등장한다. “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생활과 예보’ 전문) “비 온다니 꽃 지겠다”는 시인의 아버지가 실제 한 말이다. “평생 덤프트럭 운전을 하던 아버지가 요즘엔 성인 중학교에 다니세요. 10대 시절 청계천에서 전태일과 비슷한 시기에 노동자로 일하셨는데, 당시 문학잡지 <현대문학>을 끼고 다니며 시를 읽고, 기타와 음악을 좋아하셨답니다. 요즘처럼 장마가 지면 다른 사람들이 우산 쓰고 건물로 들어갈 때, 아버지는 어린 저를 데리고 우산도 없이 수건 하나 들고 야트막한 산길을 두 시간 정도 걸었어요. 맨몸으로 장대비를 맞으면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탈의 감각이죠. 그런 것들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미감’이에요.”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친밀할 수 있다니, 놀라움에 비법을 물었다. “친한 건 아니고요. (웃음) 수평적으로 대등한 관계라 투닥투닥 싸우는 편이에요.”
‘울남이’ 아버지의 타인의 슬픔
시인의 작품에는 ‘울음’이 많이 등장한다. 그가 ‘울보 시인’으로 불릴 정도다. 산문집 제목은 아예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다. 울보 시인답게 울음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시를 많이 썼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울음’ 중),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오늘의 식단-영(暎)에게’ 중) 등.
‘울음’ 디엔에이(DNA)도 아버지에게서 유전된 듯하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종암동’ 중), “나중에 내가 고아가 되면 <푸른 하늘 은하수>도 구해봐야지. 그때는 내가 아버지처럼 엉엉 울게. 그래. 끊어요. 그만 울고, 아버지”(‘그만 울고, 아버지’ 중) 등을 보면. 시인도 수긍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울남이’라고 부를 정도였어요. 특히 아버지는 본인과 상관없는 타인의 슬픔을 놓고 같이 슬퍼하셨어요. 감수성이든 연대든 공감이든, 무엇이 됐든 그런 것을 아버지로부터 얻었지요.” 첫 번째 시집에 실린 시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나는 죽은 사람들이 좋다.”(산문집 ‘아침밥’ 중)
시인의 작품에선 ‘죽음’도 많이 나온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세상에 살고 있다”(‘시인의 말’ 중),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꾀병’ 중), “죽은 사람들이 괜히 좋아지는 것도 병이라면 병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의 수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수가 더 많으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아침밥’ 중) 등. 그가 마음에 품은 죽음은 등단하던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누나, 옛 애인,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 정치인 등 다양하다. 그들이 시에서 ‘미인’ ‘당신’으로 호명되곤 한다(65쪽 상자 기사 참조). “생물학적 죽음이든, 관계의 죽음이든 끊임없이 죽음이 늘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 가족의 죽음이나 사건들의 영향도 있고요. 그렇게 죽음이 내가 사는 것과 같이 발걸음을 한다고 인식하면 (오히려) 삶의 걸음을 더 잘 걸을 수 있게 되고요. 한마디로 잘 죽고 싶은 거예요.” ‘잘 살고 싶다’의 반어적 표현으로 들렸다.
내부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여행’도 단골 소재다. 인천, 태백, 통영, 여수, 제주 등 한반도 지명이 종횡으로 등장한다. “여행지에서 시를 쓰려고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기억’ 때문에 가는 거예요. (시를 쓰기 위해) 경험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데 그 경험이 기억을 남겨요. 사람의 기억이란 건 저장 위치가 노트북 내장하드처럼 내부에 하나가 있고요, 또 하나는 유에스비(USB)처럼 외부에도 있나봐요. 가령 딱 한 번 가본 경북 울진이라도 다음번에 다시 가보면, 집 책상에서는 떠오르지 않던 기억이 ‘파바박’ 하고 떠올라요. 그때 뭘 먹었는지, 그걸 먹을 때 내 앞에 있던 사람이 어떤 감정으로 날 보고 있었는지까지 다 생각나죠. 이런 의미에서 USB처럼 보조 기억장치를 두는 것이 여행이에요. 여행을 많이 하는 건 (5년 후든, 10년 후든) ‘언젠간 쓰겠지’ 하는 일종의 자산 관리 같은 거죠.(웃음)”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두 번째 시집 ‘그해 봄에’ 중)
박준의 팬이라면 기다리고 있을 세 번째 시집을 시인은 언제 낼 계획일까. 그가 일하는 창비에서 “7년 후”에 낸다고 했다. “여기서 7년은 6년보다 길고 8년보다 짧은 기간이 아니라 ‘꽤 먼 미래’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통 시인들이 짧게는 1~3년, 길게는 10년 넘게 걸려 시집을 내기도 하니 이례적인 말은 아니다. 다만 궁금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릴 것으로 보는지. “비과학적인 이야기인데, 시인마다 잘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 꾸러미의 총량이 있는 거 같아요. 그 총량이 많아서 빠른 템포로 시집을 낼 수 있는 시인도 있고, 반대로 출력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 본인의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시인도 있고요. 저는 후자에 해당하는 듯해요. 입력되는 게 있어야 출력되는 게 있고, 그래서 최대한 자기 변화를 많이 줘야 하는데 저로서는 시간까지 정해놓고 강박을 주면 반드시 망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시간 강박은 자신에게 주지 말자고 마음먹었어요.”
12년 동안 출간한 책 3권이 모두 ‘대박’ 났으니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이 있을 것 같다. “상업적 성공에 대한 부담은 없어요. 제가 어떤 시집을 내든 (첫 시집처럼) 16만 부 가까이 팔리지 않을 거예요. 애당초 그만큼 팔려고 시집을 묶은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책이라는 상품의 상업적 성공에 대한 부담은 ‘일’(1)도 없어요. 다만 문학적 성취에 대한 부담감은 당연히 있지요.”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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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박준 시인은 2008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직후 “촌스럽더라도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초심’이다. 첫 시집 발간보다 1년 앞선 2011년, 그는 ‘당신이라는 약’이라는 시를 지어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투고했다. “아픈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을 먹는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제목과 비슷하다. 발표된 시점을 따져보면, 2012년 발간된 첫 시집에 실린 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2편’에 해당하고, 2011년 인터넷으로 발표한 이 시가 ‘1편’에 해당한다. ‘당신의 이름’이라는 이 시는 당시 한진중공업이 노동자 수백 명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하자 이에 반발해 크레인에서 300일 넘게 고공농성을 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송경동 시인 등이 주도해 희망버스를 탔던 젊은 시인들이 ‘사람을 보라’는 주제로 <프레시안>에 연속 기고했던 시 중 한 편이었다. 이 시에서 고공농성 중이던 김진숙 지도위원이 ‘아픈’ 박준 시인 등에게 먹고 회복할 수 있는 ‘약’이 되어준 것이다.
참고로 첫 시집에 실린 ‘2편’에 해당하는 비슷한 콘셉트의 시에선 누군가의 자서전을 써주며 구술기록작가 일을 했던 시인에게 (지어가다가 며칠은 먹은) ‘당신의 이름’은 생계를 위한 ‘밥’으로 작용했다. ‘당신의 이름’(1편) 발표 전후에도 박준 시인은 용산 참사, 제주 강정마을, 세월호 등 주요 사회 이슈들과 관련해 문인들과 함께 지지 목소리를 내거나 시를 썼다.
12년 전 ‘초심’이 잘 지켜지는지 넌지시 물었다.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르고 제가 너무 겁 없이 말했다”고 그는 겸양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시를 쓰는 동안 거의 천형처럼 따라다닐 텐데 부끄럽지만 말을 뱉어놨으니 행동이 따를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덧붙였다. 시인이 초심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예정된 인터뷰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그는 기자를 타박하지 않고 내내 성실과 배려, 그리고 달변으로 일관했다. 37살 박준 시인이 지금까지 이룬 성취보다 앞으로 이룰 일이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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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