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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김숨① “간절해지니 문장이 내게로 왔다”

등록 2020-08-14 20:30 수정 2020-08-16 14:07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그 문장이 내게로 왔다.”

김숨(46) 작가는 이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표현하고 싶은 감정,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데 적확한 언어로 포획되지 않을 때의 간절함이란…. 문득 영감이 스치듯 어떤 문장이 떠올랐을 때의 반가움이란!

김숨에게 다가온 문장 하나는 이렇다. “사람만 집을 부수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의 증언을 재구성한 장편소설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2018)의 한 대목이다. 사람만 집을 부수지. 새들은 자기 집을 부수지 않아. 새들의 집을 부수는 건 비와 바람…. 사람은 자기 집도 부수고 남의 집도 부수지. 집을 부수는 건 금방이지만 집을 짓는 데는 평생이 걸리지.

김숨 작가는 옛소련 스탈린 정권의 연해주 고려인 강제이주(1930년)를 다룬 최근작 <떠도는 땅>(2020)을 쓸 때도 그 문장이 왔고, 전작에 쓴 사실을 알고도 또 쓰고 싶었다고 했다. “제 손으로 지은 집을 제 손으로 부수는구나.” “인간만 제집을 부수지.” “어디 제집만? 남의 집도 부수지요.”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인 마을 신한촌에서 소비에트 군인들이 한인을 강제로 쫓아내자 한 사내가 홧김에 집을 부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읊조린 한탄이다.

엇갈리는 만남,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빗방울이 간질간질하던 8월4일, 서울 은평구 한 카페에서 김숨 작가를 만났다. 검정 민무늬 티셔츠와 검정 바지, 어깨에 걸치는 천가방. 꾸밈없이 소탈한 차림이었다. 먼저 ‘코로나19’ 시대의 근황을 물었다. 작가는 생각하느라 뜸 들이듯 느리게,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전업작가라 주로 집에서 지내는데, 그래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3월 네덜란드에서 예정됐던 작가 초청 행사가 취소됐고…. 관심 있는 세미나와 강의를 온라인으로 들어야 하거나, 독립서점들이 여는 작가와의 만남이 마스크를 쓴 채 이뤄져 부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들었고, 성당 미사 때 마스크를 쓴 채 서로 떨어져 앉고, 미사 때 성가 부르는 걸 좋아하는데 생략하고….” 그는 30대 후반에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나 자신도 그렇고, 인간이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려서부터 끌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의지하고 싶은 존재가 있다고 할까요.”

작가의 단편 중 초·중기(2007~2011) 작품은 대부분 ‘가족’이라는 질긴 끈으로 얽힌 사람들의 관계를 다룬다. 대체로 음울하고 답답한 분위기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내세울 게 없고 형편이 넉넉지 못하다. 누군가는 중병을 앓고, 누군가는 집을 나가거나 주인공(화자) 곁을 떠난다. 만남은 종종 엇갈리거나 유보된다. 거의 모든 단편에 ‘돌아오지 않고(는, 았다)’라는 문장(상황)이 나온다.(소설집 <국수>에는 아예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이라는 제목의 단편이 실렸다.)

“그래요? 그건 저도 몰랐네요.(웃음) 의도한 건 아니에요. 그때 쓰고 싶은 걸 쓴 거죠. 생각해보면, 그 뒤에 쓴 장편들, ‘위안부 피해자’ 연작(2016~2018)이나 <떠도는 땅>도 제자리에서 뿌리 뽑혀 어딘가로 떠나간 사람들, 그 뒤에 돌아왔거나, 돌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와서도 자기 자리가 없어진, 그래서 사실은 제대로 돌아온 것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한테 그런 존재에 대한 관심이 있나봐요.”

써지지 않으면 쓸 수 없겠구나

때론 문장이, 때론 제목이 작가에게 왔다. 이미지가 오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장편소설 <한 명>(2016)은 “제목이 온 뒤, 증언록들을 찾아 읽으면서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언젠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써지지 않으면 쓸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작가의 말)

“그렇게 내게 온 것들은 내가 나한테 하는 말, 나한테 던지는 질문 같아요.” ‘김숨’이란 필명, ‘숨’도 그렇게 문득 다가왔다고 했다. “‘호흡’이란 뜻의 낱말로 온 게 아니라 그냥 느낌으로 왔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주는 것도 좋아요.(웃음) 시 습작을 하다보니 이런 게 생겼을까 생각도 들어요.”

2016년은 김숨의 소설에서 어떤 분기점 같다. 이전 작품들이 주변의 일상과 사람들의 이야기였다면, 이 시기부터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장편을 잇달아 내놨기 때문이다. “단편집 <국수>나 <간과 쓸개>의 작품들에선 일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존재의 이야기를 썼고, 이후에는 좀더 역사적인 사건에서 돌아오지 않는 어떤 무리(집단)에 대한 이야기를 썼어요.” 그렇다고 ‘거대 담론’을 말하거나 대하소설을 쓴 건 아니다. 작가의 관심은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의 ‘뿌리 찾기’에 맞춰 있다. 그 첫 작품이 <한 명>이다. 평생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숨기고 살아온 가상의 주인공이 더 늦기 전에 용기 내어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실제 증언들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여기 한 명이 더 살아 있다…. “나도 피해자요.” 그가 한 문장을 쓰기까지 70년이 넘게 걸렸다.​

상상을 넘어서는 참혹함을 겪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건 증언자나 듣는 이 모두에게 극심한 트라우마다. 소녀들은 군인들을 받으면서 동숙 언니의 시신이 타는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만주 위안소 일이라면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가도, 정작 아무것도 기억 못하면 어쩌나 싶다.

시처럼 맑아서 더 아프고 단단한 말들

소설 <한 명>은 2년 뒤인 2018년 길원옥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을 각각 기록한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를 쓰는 계기가 됐다. 한 작품을 쓰다보면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가지치기하고, 그 가지치기가 다른 소설로 이어지는 일이 많다고 했다. 같은 해, 위안소에 끌려온 15살 소녀의 일인칭 시점에서 쓴 장편소설 <흐르는 편지>도 그렇게 쓰인 작품이다.

겨우 10대 초·중반에 끌려가 끔찍한 일을 겪은 할머니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그걸 다시 곱씹으며 글로 재구성하는 일은 단순히 비극을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작업일 테다. “힘들죠, 많이….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가 알에서 깨어 나오는 느낌? 한 단계 더 성숙해지는 느낌이 들게 되더라고요. 말하는 행위가 곧 치유고, 함께 참여하는 분들도 영향받는다고 생각해요.” 작가는 그 과정이 “인간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때가 2018년이었는데, 김복동 할머니께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건강이 많이 안 좋을 때였어요. 더 늦기 전에 할머니들 육성을 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죠. 길원옥 할머니를 먼저 찾아뵀는데, 대화가 너무 재밌더라고요. 소설 형식이 즉흥적으로 정해지고 글이 써지는 거예요. 길원옥 할머니께선 (자원봉사자한테) ‘동시 쓰기’를 배우고 계셨어요. 할머니와도 시적인 대화, 어긋나는 대화, 막 흘러가는 대화를 즐겁게 했어요. 그 이야기를 제가 할머니(의 일인칭 화자)가 돼서 풀어낸 거죠.”

실제로, 두 할머니의 증언집 소설 문장들은 시처럼 맑게 빛나서 더 아프고 단단하다.

나 부끄러워/ 나 안 부끄러워/ 아픈 건 똑같아/ 몸에 난 상처나, 마음에 난 상처나.
물고기는 물고기, 새는 새/ 사람은 사람/ 사람들만 몰라, 사람이 사람인 걸.
나는 평화를 공부할 거야. (…) 나는 하나도 안 창피해/ 나를 창피해하는 사람들이 창피하지.

고통스러운 치유와 재생의 과정은 비슷한 야만을 겪은 다른 나라 여성들과의 연대로 이어진다.

“아프지? 너 아픈 거 내가 잘 알아…/ 아파도 말해야 해/ 내가 참으라는 건 아픔을 참으라는 뜻이지 말을 참으라는 뜻이 아냐”(이슬람국가(IS) 집단의 성노예 피해자인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족 여성에게)

김복동 할머니 증언 소설도 가슴을 먹먹하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 나 자신에게도/ “진짜 날 사랑했어.”/ 싫었어. 누가 날 사랑하는 게, 나는 싫었어./ 사랑./ 복숭아 같은 그 말을 아흔세 살이 돼서야 내 입에 담네./ 죽기 전에….

*21이 사랑한 작가 김숨② ‘뿌리 뽑힌 사람들’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04.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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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습작

김숨 작가는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공모와 이듬해 문학동네 신인상에 잇따라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소설을 쓴 지 스무 해를 훌쩍 넘겼다. 등단하고도 한참이나 숨을 고르던 그는 2005년 첫 소설집 <투견>을 시작으로 2020년 <떠도는 땅>까지 15년 동안 20권(장편 13권, 단편집 7권)의 소설책을 쏟아냈다. 작품 수로는 모두 58편이나 된다.

작가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장애인 시설에서 돌봄 일을 한 적도 있다.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됐을까.

“고등학교 때 문학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시 습작을 많이 했고 백일장에서 상도 제법 탔어요. 하지만 제게 문학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국어 공부도 잘하지 못했죠.(웃음) 대학 가서도 문학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막연하게 ‘글이라는 걸 쓰면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 습작을 하다가, 어느 날 소설을 쓰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썼는데, 그게 등단작이 됐어요. 지금 보면 별 어려움 없이 일찍 등단한 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이게 제 길이니까 열렸던 게 아닐까….”

작가는 “문장 수업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덜컥 등단부터 돼, 뒤늦게 본격적으로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제 몸에 문학의 씨앗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첫 소설집이 나오기까지 8년이나 걸렸던 이유라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해마다 꾸준히 한두 권의 장편소설과 소설집을 내온 걸 보면, 지나친 낮춤이 아닐까? 김숨 작가는 본디 그런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글쓰기 말고 좋아하는 건 동물이라고 했다. “강아지를 키워요.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최근 몇 년 새 작가의 눈길은 주변의 일상과 사람들에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로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모양새다. 허균문학작가상(2012), 현대문학상(2013), 대산문학상(2013), 이상문학상 대상(2015), 동리문학상(2017) 등 여러 문학상 수상 경력은 김숨만의 글과 작품 세계가 주목받고 있다는 또렷한 징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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