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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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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다는 말

등록 2020-03-31 11:50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그날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이었다.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사무실 안에 있는 서류가 날릴 만큼 제법 찬 바람이 들었다. 얇은 셔츠 차림의 남자는 어린아이 둘을 앞세우고 여자와 함께 들어왔다. 누가 봐도 가족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구겨진 종이 한가운데는 계류유산이, 하단에는 산부인과 상호가 찍혀 있었다. 손바닥만 한 영수증도 건넸다. 우리는 짧은 영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유독 노 잡, 노 머니, 노 휴먼을 강조했다.

노 잡, 노 머니, 노 휴먼

방문자가 말 뚜껑을 열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나는 노 잡, 노 머니, 노 휴먼을 서두로 알아들었고 본론으로 접어들길 기다렸지만 대화는 1시간 가까이 공전했다. 요약하자면 일거리가 없고, 돈이 없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으니 일자리를 좀 알아봐달라는 것이었다.

인권 사안을 다루는 내 일터에는 다양한 인권문제를 해결해주기 바라는 사람들의 방문이 잦다. 난민 인정이 되도록 도와달라든가, 이렇게 일자리를 요구하는 분도 더러 있다. 나는 안타깝지만, 우리 기관은 국가기관의 인권침해나 차별을 조사하고 예방하는 교육을 해서 도움을 드리기 어렵다고 천천히 말씀드렸다. 그는 재차 호소했다. 나 역시 같은 말이 저장된 기계처럼 돕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혹시 몰라 이번엔 내가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기관명과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그는 종이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보지 않고도 아는 것 같았다. 그는 화내며 당신의 ‘시니어’(책임자)를 불러오라고 했다. 재차 요구하지 않았으니 그저 홧김에 해본 말이었을 것이다. 좁은 상담실에서 우리는 서로 눈 둘 곳을 몰랐다.

늘 이런 순간이 곤혹스럽다. 안타까운 마음은 진심이어도 안타깝다는 말처럼 천하에 쓸모없는 게 없다.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그냥 와본 것일 수도 있다. 서로 사정을 잘 알아서 침묵이 흘렀다. 그의 아내는 아이들이 옆에서 보채도 미동도 없었다. 나는 그때,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했다. 두 사람은 합의하에 아이를 가진 걸까.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또 아이를 가졌더란 말인가. 이 아내의 삶은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주제넘은 생각을 멈추려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는 내 행동을 이제 그만 가달라는 신호로 읽었는지 나를 째려봤다. 나는 서 있고 그들은 앉아 있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아내가 남편의 등을 쓰다듬으며 뭐라고 말했다. 파키스탄 사람이라니, 저 말은 파키스탄 말이겠구나. 짐작하는 사이 일행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냥, 어서, 여기를 나가자는 말이었나보다.

남자는 아이들을 앞세우고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까지 따라나서는 나를 그는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러더니 내게 “노 휴먼!”이라고 쏘아붙였다. 이번엔 노 잡, 노 머니는 없었다. 나는 외마디 그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자리에 돌아온 나는 쓰다 남은 문서를 작성했다. 마지막 몇 줄만 쓰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돕지 못한다고 말할 때 나는 아이(I)가 아니라 위(We)라고 했다. 어느 기관에 상담을 갔는데 그리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나는 어찌했을까. 아마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나처럼 안타깝지만 도울 수 없다고 말하는 ‘우리라는 관계자들’을 이 나라에서 얼마나 많이 만났을까.

‘우리라는 관계자들’

퇴근길, 신호 대기에 걸려 차를 세웠다. 오른편에 약국이 보였다. 약국 유리문에는 ‘마스크 구매 신분증 필참’과 ‘공적 마스크 오늘 분 소진’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비자가 있는 외국인들도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마스크를 사려면 필요할 텐데 그들에게 외국인등록증은 있을까. 나는 내 안타까움에 메스꺼움을 느꼈다.

김민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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