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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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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흥미롭도다, 1930년대 여성들

신춘문예로 등단한 첫 여성작가 백신애의 <혼명에서>
등록 2020-01-03 12:53 수정 2020-05-0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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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참으로 용감한 여자라오. 꼭 연애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부모가 함부로 정한 결혼에 반대하는 것일까요. 앞으로 나아가려는 열정과 용기가 눈앞의 안일에만 만족하는 당신들이나 나와 같은 무리들과는 레벨이 틀립니다.”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추진되는 결혼에 맞서 은밀하게 일본 유학을 도모한 정희는 결국 결혼식날 사라졌다. 사람들은 ‘사랑의 도피’ 따위의 가십을 양산하고, 경순은 이들에게 ‘레벨(차원)이 낮다’고 일갈한다.

그런데 이상한 대목, 자기 자신을 정희가 아닌 정희를 헐뜯는 사람들과 같은 레벨에 놓는다. 정희와는 보통학교 교원 일을 하며 우정을 쌓았고, 착실히 돈을 모아 함께 일본 유학을 가자는 뜻을 품었던 경순은 왜 정희와 같은 레벨에서 스스로 ‘낙오'(이 작품의 제목이 ‘낙오’다)한 것일까. 늙은 부모와 직업이 없는 오빠 부부의 형편 때문에 결국 유학을 연기한 자신에 대해 “가슴에 불평을 가득 품고도 큰소리 한번 못하고 순순히 향상 없는 생활을 계속하는 핏기 없는 인간”이라는 통렬한 자기 객관화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여성이 완성한 ‘주체적 여성’의 레벨은 높낮이보다 깊이가 다르다.

백신애 중단편선 (문학과지성사)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가운데 명시적으로 여성해방이나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이는 없다. 신랄한 가부장제 비판도 없다. 그저 작가가 설정한 캐릭터를 이해하고, 플롯(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당시 여성의 삶을 구속한 인습의 실체가 보이고, 그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주체적 여성에게서 기묘한 용기를 얻는다. 백신애는 1929년 신춘문예에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는데, 신춘문예로 등단한 첫 여성작가라고 한다.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몸담기도 했다.

백신애 자신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신여성이었지만, 작품 어디에서도 계몽적인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무능한 두 아들 탓에 동네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지만, 며느리가 낳은 손주가 아들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매촌댁(‘적빈’)의 서사는 작가로부터 아무런 평가도 받지 않은 채 자유롭다. 해산한 며느리에게 밥을 안긴 뒤 텅 빈 뱃가죽이 등에 붙은 채 귀가하던 매촌댁이 ‘사람은 똥 힘으로 산다’고 기어이 변의를 참아내는 모습은 어쩌면 찬사로도 읽힌다. 백신애 작품 속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들 가운데 계몽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읽히는 여성은 없다. 그저 동질감을 불러일으키는 여성들만이 있다.

자신의 친척뻘인 여성과 남편이 함께 있는 불륜의 현장을 급습해 남편의 신발을 던져 창문을 깨버린 주인공(‘광인일기’)은 미쳤다는 취급을 받고 지금으로 치면 정신병원에 감금되는데, 탈출을 감행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네 어미 까닭에 너희들이 불행해졌다고 하더라도 그 말은 믿지 마라. 너희 아버지가 이 어미에게 수수께끼 문제를 내놓은 까닭이다.” 자책도, 자기 비하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자기 행위를 긍정하는 백신애의 여성 캐릭터들은 너무도 흥미롭다. 이것이 1930년대 여성들이라니. 그때 그 언니들의 레벨에 맞추려면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명선 팀장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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