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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직선

등록 2019-11-07 02:23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K는 소도시에 우뚝 솟은 빌딩처럼 이름이 높다. 무명인 시절이 있었지만 갈고닦은 실력을 사람들은 외면하지 않고 알아봐줬다. 국내를 넘어 세계 학자들과도 겨룰 만한 자질을 지녔기에 외피만 그럴듯한 작가는 아니다. 다만 그가 급하게 달려오면서 생략한 것은 대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문학적 능력과 문체다. 즉 희미한 빛을 포착하는 섬세함의 무기는 없는 사람인데, 빨리 찾아온 성공은 이런 허점을 숨기고 싶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그가 가진 구멍을 메우는 데 동원됐다.

급하게 읽는 장자, 니체, 프로이트…

‘빨리빨리’의 습성은 좁게 보면 최고점에 얼른 닿으려는 한 개인의 욕망 같지만, 사실 주변인들도 이해관계에 한 발씩 담그고 있어 단점들을 눈감아주는 잘못을 저지른다. 속도전과 생략이 가져오는 비참한 결과는 책 편집에서도 드러난다. 몇 년 전 고대사 책을 한 권 편집한 적이 있다. 이미 서너 차례 읽은 글을 한 번 더 본다는 건 뇌를 마비시킬 것만 같았고, 하필 교차편집도 건너뛰었다. 한 번 더 봐야 한다는 신중함과 이만하면 됐다는 나태함 사이에서 후자가 이겼다. 그 후 최종 판본에서 10개도 넘는 오타가 발견돼 1500부를 모두 폐기하고 재인쇄에 들어갔다. 대형 건축이나 교량 공사가 아닌데다 몸에 들어가는 음식물도 아니니, 책처럼 목숨에 덜 치명적인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조급함을 떨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마인드는 젊은층의 독서 유형과도 연결된다. 얼마 전 20대 편집자 몇 명을 만났는데, 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맞닥뜨린 현안을 살피느라 시선을 좁게 둔다는 점이다. 요즘 그들의 관심사는 페미니즘·환경·심리학이고, 이런 이슈를 시의적절하게 다루는 국내 작가들의 소설은 그들 독서량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이건 다른 면을 취약하게 만든다. 바쁜 20대는 원전을 접하기보다 2차 텍스트를 읽는다. 장자를, 니체를, 프로이트를 그렇게 급하게 읽는다. 해당 외국어를 공부해서 원서로 읽겠다는 생각도 잘 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빨리 도달하려는 욕망은 내 경험상 40대에 들어서면 큰 벽에 부딪힌다. ‘더 빨리’가 낳는 과정들의 압축은 여러 사람의 삶에 상처를 낸다. 나와 내 몇몇 선배에게도 그런 ‘가해’의 경험이 있다. 사회에는 늘 신진 작가와 신입 사원들이 있어 먼저 경력을 쌓은 자는 그들이 한 계단씩 밟고 오는 것을 지지해줘야 한다. 하지만 성미 급한 40대들은 때로 그들에게 실력과 전망이 없다고 단정짓는다. 이런 일이 두세 번 반복되면 타인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나를 발견하게 될 뿐 아니라 자기 얼굴과 몸에도 멍이 들게 된다.

우리가 그 시절 간과해온 것들

결국 신속과 직선의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신속은 때로 난폭함을 낳고 근경을 원경으로 처리해 공감의 기회들을 지운다. 그리하여 신속하게 지나온 사람들은 언젠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하나 되짚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대만의 작가 탕누어는 후발 주자 사회들은 “황급히 쫓아오느라 놓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의 틈을 견고하게 메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지식이란 것은 지적 능력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강조하듯 타자의 마음을 살필 줄 아는 지식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그 시절 간과해온 것들이 물밑에서 아우성치고 있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아우성들에 귀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이번호부터 이은혜 출판사 글항아리 편집장이 3주마다 ‘노 땡큐!’를 씁니다. 2007년부터 편집자로 살면서 역사서와 철학서 편집에서 시작해 점차 정치, 문학, 과학, 에세이 등 여러 영역으로 넓혀 필자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프로독서가’가 꿈이라고 합니다.이은혜 출판사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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